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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Apr 05. 2021

소녀들아, 하고 싶은 건 다 하렴.

북스마트 (2019) : 이게 바로 진정한 '걸 파워'지!


 'Bookworm'이라는 단어가 있다. 직역하자면 '책벌레'라는 뜻이다. 사실 이 단어는 우리나라에도 있는 말이다. 심지어 같은 뜻으로.


 자고로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어릴 때부터 응당 해야만 하지만 막상 하기에는 쉽지 않은, 그렇기에 그만큼 바람직하고 고결한 행위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따라붙는 별명들 중에서 긍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단어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라는 단어와 함께 합성된 '벌레'라는 멸칭이다. (물론 '독서광'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 또한 따지고 보면 그렇게 긍정적인 뉘앙스는 아닌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책 속에 코를 박고 살아온 나에게 '책벌레'라는 별명은 마치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책을 많이 읽는 내 모습을 마냥 긍정적으로 봐주던 어른들과는 달리, 나와 비슷한 또래집단은 나에게 '책벌레'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당시 나는 그 별명이 좋다거나 자랑스럽다기보다는 은근히 부끄러웠다. 도수가 높은 두꺼운 안경을 낀 채로, 쉬는 시간마다 10분간 책을 펼치고 읽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한 마디씩 친구들이 툭툭 던지는 '책벌레'라는 호칭을 듣다 보면 내가 지금 책을 읽고 있는 게 과연 잘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혹시 나 지금 찐따 같은가? 당장에라도 책장을 덮어버리고, 그들과 함께 복도에 나가서 시시덕거리거나 거울을 보며 틴트를 바르고 앞머리 롤을 말며 수다 떠는 그런 게 더 '쿨'한 행동 아닐까?


 그러나 생각만 많고 결코 행동에 옮기지는 않는 청소년이었던 나는 쿨해 보이는 또래들 사이에 굳이 어떻게든 한번 껴보겠답시고 뻘쭘함을 감수하진 않았다. 거울 앞에 삼삼오오 모여서 꺅꺅대는 화려한 친구들의 예쁜 모습을 보며, 두꺼운 안경테를 한번 추켜세우고는 다시 책 속으로 고개를 파묻는 내 모습은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은 벌레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20년 뒤. 이제는 까마득해서 기억조차 나지 않던 10대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오른 건 심심해서 충동적으로 들른 극장에서 우연히 한 영화의 포스터를 발견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이 포스터, 뭔가 범상치 않다.

 


북스마트(Booksmart).


 영화 포스터에서 풍기는 느낌은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하이틴 영화로, 뭔가 전혀 책과 관련된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영화 제목에는 '책'이 들어 있었다. 편견일 순 있으나 보통 제목에 '책'이 들어가는 영화는 대략적으로 특유의 차분하고 침착한 분위가 있기 마련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포스터만 봐서는 대체 책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책벌레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자연히 호기심이 생겼다.


  '북스마트'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니 해당 단어는 '실제 경험보다 책으로부터 얻은 지식과 경험이 더욱 많은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ㅇㅇ을 책으로 배웠어요"랄까. (반대말로는 '스트릿스마트 Streetsmart가 있다고....) 갑자기 예전에 한 남자가 내게 했던 말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는 책을 '너무' 많이 읽는 경향이 있어."



 마치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나의 과도한 근심 걱정과,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나의 드라마퀸적인 성향이 바로 '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처럼. 나와 완전히 반대되는 '스트릿스마트' 성향이었던 그는 항상 내가 나의 엉뚱한 생각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을 재잘재잘 떠들어 댈 때마다 재밌다는 듯 웃으며 내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책을 많이 읽고, 책에 의존하는 사람을 'Worm벌레'가 아닌 'Smart'라는 단어로 표현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왠지 아직 보지도 않은 이 영화가 무척 마음에 들어버렸다.


 무려 당시에 가장 핫했던 영화 <소울>의 포스터가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나는 왠지 이 영화가 더 보고 싶었다.  이 나이에, 30대 중반의 여자 혼자, 본인 나이의 반토막인 여자애들이 나오는 하이틴 영화를 보러 가는 그림이 남들이 보기엔 조금 우스워보일 수 있을지라도.


 사실, 이 나이쯤 되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인생은 짧고, 대세가 무엇이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걸 보고 살아야 하지 않겠냔 말이다. 당연히 <소울>을 선택해야 할 것 같은 무언의 압박 속에서, 나는 <북스마트>의 티켓을 구매했다. 텅 빈 상영관에 발을 들였을 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상영관 내의 관객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몰리와 에이미다. 그들의 첫 등장은 꽤나 비범한 편이다. 몰리의 방에 액자로 놓여 있는 RBG의 사진과, 에이미의 차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스티커들-RESIST-은 그 자체만으로 두 사람의 캐릭터를 설명한다.


 몰리와 에이미는 학교의 몇 안 되는 '범생이' 콤비이다. 몰리는 예일대 합격장을 받아둔 학생회장이고, 그녀의 친구인 에이미 또한 공부를 잘하며 평소 일탈이라곤 전혀 하지 않는 소녀이다. 그녀들은 소위 말하는 아웃사이더로, 학교의 인싸들에게 은근히 무시당하고 따돌림을 받고 있다.


 초반부, 평범한 하이틴 영화스러운 전개로 흘러가는가 싶었던 영화는 갑자기 급발진을 하며, 몰리와 에이미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 영화는 하이틴 영화 특유의 '하이틴적' 문법과 판타지 가득한 설정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특히 몰리 역할을 맡은 배우는 엄밀히 말하면 예쁜 편은 아니다. 여태까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졌던 하이틴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습(<가십걸>의 블레어나 세레나 등)을 생각해보면 그 점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진다.


 안경만 벗으면, 헤어스타일만 바꾸면, 패션 스타일만 바꾸면 마치 요정을 만난 신데렐라처럼 아름다워지곤 했던 수많은 사브리나와 클루리스들을 떠올려보라. 이 영화의 주인공 몰리를 보면, 여태까지 봐 왔던 영화들 속의 그녀들의 화려한 외모는 기만에 가까웠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몰리와 에이미



 통통한 몸매에, 웃으면 턱살이 이중으로 접히는, 확실히 예쁘지는 않은 몰리는 여태까지 봐왔던 어떤 '평범한' 미국 여고생의 모습보다도 더 현실적인 Girl Next Door의 전형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옆에는 상대적으로 할리우드에서 선호하는 '평범한 여고생'의 스테레오 타입처럼 보이는 백인 소녀 에이미가 있다. 그런 그녀에게는 반전 요소가 하나 있는데, 바로 그녀의 성 정체성이다. 그녀는 2년 전 커밍아웃을 한 레즈비언이다. 평범한 범생이 소녀와, 똑같이 범생이인 레즈비언.


 에이미는 학교에서 가장 핫하다는 라이언이라는 여학생에게 푹 빠져 있다. 그녀의 절친인 몰리 또한 당연히 그녀의 은밀한 짝사랑을 알고 있고, 두 사람은 라이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너무 쿨하지 않냐고. 괜찮은 애 같다고. 그렇게 호들갑스러운 걸즈토크를 지속하던 두 사람 앞에 나타난 라이언은 외면에서 또 한 번 내가 나도 모르게 가져왔던 할리우드 영화의 짝사랑 상대 캐릭터의 스테레오 타입을 깨부순다.




 짧은 파마머리에 작은 키, 타투를 훤히 드러낸 나시티를 입고 편안한 차림으로 보드를 타는 그녀의 비주얼은 꽤나 신선하다. 그녀는 분명 할리우드 영화 속에 으레 나오는 주요 히로인들처럼 매끈한 피부나 조각 같은 외모를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툭 튀어나온 앞니 등, 외모에 개성이 넘치다 보니 첫인상은 조금 괴짜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외모와 상관없이 몰리와 에이미의 학교에서 가장 '쿨'한 아이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순간부터 오직 대학 진학만을 목적으로 청춘을 온전히 바쳐왔던 몰리 또한 아닌 척하지만, 짝사랑을 하고 있다. 바로 학교 최고의 킹카인 닉이다.



 

 닉의 외모 또한 흔히들 생각하는 '학교 킹카'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다. 그동안 할리우드 하이틴 무비에서 다뤄 왔던 교내 킹카의 비주얼이 <하이스쿨 뮤지컬>의 잭 애프론과 같은 비현실적으로 눈부신 미소의 백인 남성으로 대표되었다면, <북스마트> 속 닉의 외모는 묘하게 현실적으로 보인다. Boy Next Door의 느낌이랄까.


 사실 이 영화 안에서 다루는 하룻밤의 해프닝들은 다른 할리우드 하이틴 무비에 비해 결코 현실적이지 않고, 그 속에서 몰리와 에이미가 엮이게 되는 수많은 등장인물과의 사건들 또한 연극이나 애니메이션 같을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무척 재미있고, 등장인물들에게 이입을 하게 되는 이유는 이와 같이 친숙한, 어느 정도는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는 진짜 우리의 평범한 이웃 같은 인물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물들이 서로 소통하고 무엇인가를 쟁취해가는 과정에 있어서, 등장인물들의 '외모'적인 요소가 전혀 스토리 진행에 있어 걸림돌로 쓰이지 않는 점도 인상적이다.

 

 몰리는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지만 체형은 통통하다.  에이미는 평범한 듯하나 확실히 성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상대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둘은 스토리가 진행되는 동안에 영화 안의 그 누구로부터도 본인의 외모적인 특성에 대해 놀림이나 지적을 받진 않는다.


 몰리가 마음먹고 파티에 나서자 그녀는 순식간에 쿨한 닉과 당당하게 어울릴 수 있는 핫 걸이 되며, 에이미는 동경하던 라이언의 옆에서, 핫한 친구들과 어울려 숨겨 왔던 노래 실력을 자유롭게 뽐낸다.


라이언에게 격려를 받은 에이미가 처음으로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장면. 노래도 무척 좋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서로의 외모를 보지 않고, 내면을 보고, 그대로 날것인 채로 소통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찌 보면 지극히 동화적인 세계관이지만, 그 대책 없는 유쾌함과 밝음이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현실적인 인물들이 비현실적인 사건을 경험해가며, 오직 그 시기에만 있을 수 있는 고민을 그 나이대에만 할 수 있는 방안으로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무척 즐거운 경험이었다. 비록 제목처럼 '책'의 비중이 많이 나오진 않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몰리와 에이미의 모습을 보다 보면 마치 책벌레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며 알게 모르게 남들의 시선에 주눅 들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떠올랐고, 그래서인지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10대 시절로 돌아간 듯이 무척 즐거웠다.


 영화의 마지막, 졸업식 연설에서 몰리는 함께 졸업하는 친구들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다시 돌아오진 않겠지만, 완벽한 시간이었어요!"

억누를 수 없는 찬란한 젊음!


 나도 그때,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10대 학창시절에 한 번쯤은 저렇게 일탈을 해봤다면 어땠을까? 그냥 하루쯤은 책을 덮고 야간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놀러도 가보고, 예쁘게 꾸미고 시내에 나가 밤새 놀아도 보고 했다면 어땠을까.


 영화가 끝난 뒤 극장을 나오는 내 머릿속에선 19살의 내가 이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어색하게 꾸미고 신나게 놀고 쪽팔림도 당해보고 그러면서도 한층 후련하게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완벽했어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당장 저 시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또다시 꿋꿋하게 내 DNA에 프로그래밍된 모범생 근성으로 책벌레의 길을 갈 것이라는 것을.


출처 : 나도 모르게 생각한 생각들 / 요시타케 신스케



 그러나, 그것도 뭐 나쁘지 않지 않을까. 이 영화 덕분에 나는 책에 파묻혀 지냈던 나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Bookworm이 아닌 Booksmart로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Worm이 아닌 Smart. 분명 나는 책 때문에 또래 친구들과 많이 어울리지 못했을지언정 책으로 세상을 배웠고, 그걸로 먹고살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지지 않은가.


 그러니 세상 어딘가에 나처럼 아싸 기질로 고민하고 있는 청춘이 있다면 그다지 고민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소녀들은 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된다. 진짜 그래도 된다니까.




+


비록 서브 캐릭터였지만 호프 역할을 맡았던 이 분 정말 매력적이다. <반지의 제왕>의 아르웬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비주얼 쇼크를 느꼈습니다... QAF의 브라이언 키니의 성별 반전 버전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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