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였나, 호주였던가. 아마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내가 여태껏 살면서 영어 원서를 탐독했던 시기는 그때가 거의 유일했으므로. 하여튼 아마도 그 시기쯤이었을 것이다. 어느 작고 허름한 서점에서 내가 이 책을 손에 넣었던 것은.
당시 내가 어떤 점에 이끌려 이 책을 골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했던 것은 당시 나는 타향에서의 고립된 생활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에야 스마트폰이 있지만,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었고 인터넷도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다. 타지 생활에 적응하기 바빴던 초반에는 괜찮았지만, 한 달, 두 달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그 삶이 지겨워졌다. 나는 새로운 이야기에 굶주렸다. 미친 듯이 책이 보고 싶었다. 당시엔 지금처럼 전자책이 활성화되지도 않았었으니, 자연히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그저 현지 서점에서 파는 그나마 영어로 된 도서뿐이었다.
당시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페이퍼백들이 쭉 진열되어 있던 서가에서, 내가 어떻게 이 비범한 책을 딱 발견할 수 있었던 걸까? 때로는 그렇게 기억나지 않는 순간들이 내게 경이로운 경험을 선사하기도 한다.어쨌든 그것은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었다고 생각한다. 한 세기에 한 번 나오는 비범한 존재라는 화이트 타이거처럼, 분명 이 책은 아마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존재감으로 나를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렇게 책장을 펼친 나는 이 책의 제일 첫 장부터 무척 어려운 단어를 마주하게 된다. 바로 Entrepreneur라는 단어이다. 대체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전자사전에 뜻을 검색해 보려고 하면 어떻게 스펠링을 넣어야 할지도 모르겠는 (나는 아직도 이 단어의 스펠링을 한 번에 치지 못한다..) 이 단어. 보통 때의 나였다면 바로 포기했겠지만, 나는 이상하게 이 단어에 끌렸다. '앙트라퍼뉴얼'이라고 읽는 이 단어의 뜻은 이러하다.
Entrepreneur 기업가, 창업가, 혹은 모험적인 사업가.
이 책은 주인공 발람이 인도를 방문하는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에게 보내는 편지글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발람은 자신이 '스타트업'(그렇다, 나는 2008년에 이 책을 통해 처음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을 시작한 Entreprenuer라고 강조한다. 단순히 '기업을 세우고 사업을 일으킨 자'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넘치는 자부심을 담아.
점점 책을 읽어나가며, 나는 발람이 왜 서두에 그토록 Entreprenuer와 스타트업에 대해 강조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의 삶을 이해하려면, 먼저 저 두 단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이 책을 3번 정도 더 읽었다. 매번 읽을 때마다 주인공의 신랄한 유머 감각에 감탄하면서. 또한 '이렇게 재미있는데, 대체 왜 영화화가 되지 않는 것일까?'를 늘 궁금해하면서.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이토록 매력적이고 음험한 캐릭터를 결코 놓치지 않을 텐데.
그렇게 매번 왠지 모를 아쉬움과 의문을 남긴 이 소설은,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접한 후 10년도 더 넘은 2020년에야 비로소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목록에서 <화이트 타이거>를 본 순간, 나는 '마침내!'라는 환성을 질렀다. 그리고 영화를 보기 전, 오랜만에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화이트 타이거>를 다시 읽었다. 얼른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이번에는 한국어로 된 전자책으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적당히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읽었는데도 이 책은 여전히 그 날카로운 매력이 살아 있었다. 한 문장 한 문장마다 발람의 야망과 에너지가 동맥처럼 펄떡였다.
책을 덮자마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 닭장 속의 닭으로 태어났던, 오랜 세월 동안 열쇠를 찾아 헤매던 빈곤층의 소년이 주인의 삶을 훔쳐 성공한 기업가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이미 여러 번 봐서 다 아는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몰입하여 단숨에 영화의 엔딩까지 달렸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열쇠를 찾고 있었도다. 그러나 문은 줄곧 열려 있었던 것을."
나는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이 <화이트 타이거>라는 컨텐츠를 사람들이 도저히 보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로 매력적으로 소개하는 글을 쓰고 싶음에도 사상 처음으로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는 답답함을 느낀다. (내 머릿속은 지금 그야말로 '이거 참 좋은데.. 뭐라 설명을 못하겠네.' 이 상태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그저 압도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번을 읽고, 봐도, 발람이라는 캐릭터는 나를 압도한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고, 아무 생각도 안 들게 만들며, 그저 '와우'라는 외마디 비명만 내지르게 만드니까.
<화이트 타이거>는 권선징악을 다루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안에서는 선과 악이라는 촌스러운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돈 앞에 윤리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요즘 시대에는 더욱 그렇지 않을 것이고. 이것은 그저 한 주인과 하인의 이야기이다. 단지 그 하인이 종국에는 주인의 목을 따고 스스로 주인이 되는 비범한 존재일 뿐.
"사랑이라는 가면 뒤에서 우리는 주인들을 증오하는 걸까요, 아니면 증오의 가면 뒤에서 그들을 사랑하는 걸까요?"
그에 의하면, 인도에서 빈곤층이 성공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범죄 혹은 정치. 그 와중에 하인 계급으로 태어난, 한 세기에 한 번 태어난다는 '화이트 타이거'같은 존재였던 발람은 인도 사회가 하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가두고 있는 닭장을 벗어나기 위해 전자의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그럼 주인공이 악인인가요?'라고 묻는 것은 그저 촌스러운 행위일 뿐이다. 그에게 살인은 그저 인간답게 살기 위한 행위였고, 그것을 위해 단 한 번의 살인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살인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인으로 살지 않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덧붙이며.
그는 닭장을 뛰쳐나가기 전, 평생 동안 자신을 도구 취급하며 옥죄어왔던 '가족'의 상징인 할머니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전 남은 인생을 우리 속에 갇혀 살 수는 없어요. 미안해요."
일전에 그는 뉴델리 국립공원의 '화이트 타이거'를 가두어둔 우리 옆에 '당신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상상해 보라'는 표지판을 보고 생각한다. 본인은 전혀, 아무런 문제도 없이 그렇게 상상할 수 있다고. 그의 삶이 이미 닭장 같은 우리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말미에 그의 가족이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해서 그는 애써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그의 곁에는 이제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어린 조카 다람만이 남아 있다. 다람은 삼촌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그 선택으로 인해 자신의 부모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하고 있지만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 그는 발람의 입장에서는 언젠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어린 화이트 타이거이다. 수완 좋은 사업가인 발람은 언젠가 다람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은 조금 후의 일일 뿐이다.
"화이트 타이거는 절대 친구를 사귀지 않습니다. 너무 위험하니까요."
그는 그렇게 가족도, 자신이 죽인 주인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범죄자들이 꿀 수 있는 악몽에 대해 말할 뿐이다.
전형적인 권선징악 영화에서는 가난한 자가 부자를 죽이고는 매일 밤 자신이 죽인 사람들로부터 쫓기는 악몽을 꾸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보다 범인이 꾸게 되는 진짜 악몽은 성질이 좀 다른 것으로, 오히려 자신이 범죄를 일으킨 것이 현실이 아닐 것 같을 때 찾아온다. 자신의 주인을 죽인 것도, 겁에 질렸던 것도 꿈이고. 깨어나면 여전히 주인이 살아있고, 나 또한 아직 누군가의 하인인 것이다. 하지만 그 악몽에서 깨고 나면 곧 차분해지는 호흡 속에서 그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인을 죽인 게 현실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닭장을 탈출한 것이다.
발람은 시인 이크발의 시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한 순간 사람은 노예가 되길 멈춘다.'
저로 말씀드리자면, 전 어릴 때부터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뭔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전 노예로 남아있을 운명은 아니었던 게죠.
비록 하인으로 태어났지만, 발람은 태생부터 타고난 Entreprenuer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갈구했으며, 그 야망을 단지 꿈으로만 남겨두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그에게 억지로 뒤집어씌워진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그 우리를 벗어난 한 마리의 '화이트 타이거'의 성공 신화이다. 우리는 책과 영화를 통해, 성공한 스타트업을 경영하며 끊임없이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Entreprenuer의 인생 여정 중 극히 은밀한 일부를 목격한 것일 뿐이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뱅갈루르의 Yahoo! 건물에 붙어 있는 "당신은 얼마나 크게 생각할 수 있는가?"라 쓰여있는 현수막을 보고 발람은 양팔을 크게 벌리며 이렇게 외친다.
"이만큼 크게, 이 씨팔놈아!!"
그리고 이 책을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도, 나는 이 부분에서 항상 등줄기에 소름이 돋고 만다.
이 영화의 말미에 묘사되는, 더 이상 하인 '발람'이 아니라 '화이트 타이거 드라이버스'라는 택시 회사의 사장 '아쇽 샤르마'로 거듭난 주인공의 모습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그가 자신의 사업과 직원들을 소개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기사들을 하인 다루듯 하지 않아요. 그들을 내 '가족'이라고 부르지도 않죠. 그들은 제 직원입니다. 나는 그들의 보스이구요. 우리는 계약서에 서명을 합니다. 그게 전부죠. "
그는 이렇게 자신이 시작한 스타트업에서, 구시대적인 주인의 태도도 아닌, 가'족'같은 회사도 아닌, 지극히 합리적인 태도로 기사들을 대한다. 스스로의 삶의, 한 회사의 주인이 되기 전에 그 스스로 이미 하인의 삶을 살았기 때문인걸까? 그는 아마도 뱅갈루르에서 자수성가한 동시대의 사업가 중 가장 하인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문제가 발생해도 기사들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스스로 책임을 진다. 그럼으로써 그는 스스로 말한다. '난 내 주인들과는 다른 길을 택했다'라고. 자신은 이제 빛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 그는 화면 앞으로 한 걸음씩 걸어오며 화면 너머의 시청자들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한다. '나는 닭장을 벗어났다'라고. 그리고 그가 마침내 화면을 벗어나자, 그의 뒤로 덩그러니 남겨진 '화이트 타이거 드라이버스'의 직원들은 가만히 그가 바라보던 화면 너머를 바라본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저들은 과연 닭장 속에 갇혀 있는 것일까?
그들 중에도 '화이트 타이거'가 숨어 있을까?
어찌 됐든, 야망을 가질지어다. 오직 야망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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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아무래도 허접하고 두서가 없다 보니 내 의도대로 영업이 잘 안된 것 같아서 <화이트 타이거>의 예고편을 첨부한다. 주인공 발람 캐릭터의 매력이 충분히 잘 드러나는 감각적인 영상이다. (특히 OST로 Queen의 'I want to break free'가 나오는데 이보다 적절할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