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리나 Jun 05. 2021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을 때

소멸을 맞이하는 가장 다정한 태도


 나의 인생은 1999년 8월 18일에 한 번 끝났다.


 그날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등장한 지구가 멸망하는 날이자, 네 개의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십자 모양으로 배열되는 그랜드 크로스의 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세상의 종말에 다소 과몰입하는 경향이 있었다. 10살 때부터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의 지구 멸망을 예언한 시를 읽으면서 나의 남은 생이 얼마나 되는지 D-데이를 따져보고, 도쿄에 지진이 일어나 세상이 멸망한다는 세계관의 CLAMP 만화 <X>를 애착서로 끼고 다녔으니까. (그런데 이거 정말 완결을 못 보고 죽게 생겼다...)


 그리하여 내 인생의, 그리고 전 인류의 영락없는 마지막 날일 줄 알았던 1999년의 8월 18일 바로 전날 밤.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당시의 나는 지금 생각해도 초등학생이 느끼기에는 너무 다양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공포인지, 체념 일지, 절망 일지 모를. 모쪼록 이것이 세상이 멸망하는 날이라면, 그리하여 8월 18일이 되는 순간 세상에 멸망이 일어난다면, 적어도 내가 잠든 사이에 모든 게 끝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1999년 8월 18일이 되었는데도 세상은 멸망하지 않았다. 1999년 12월에도 마찬가지였다. 해가 바뀌어도 밀레니엄 버그는 발생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기적적으로 이 세상은 끝나지 않았지만, 세상의 끝과 관련된 나의 우울한 망상은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한순간에 끝나버리지 않았기에 나는 더욱 두려워졌다. '종말'에 대한 내 예상은 틀렸지만, 어쩌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지구 종말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단지 그 실행방식이 그렇게 한날 한순간 모든 전원이 나가듯이 '팍'하고 한순간에 모든 생명체가 지구에서 쓸려나가는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오히려 종말이란 좀 더 개별적이고, 점진적인 것이었다.


 누가 뭐래도 세상은 확실히 종말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지구에 살아 있던 지난 30년 동안에도 지구는 꾸준히 살기 팍팍해져 갔으니까. 그렇게 서서히 끓어가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우리는 조금씩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멀쩡히 일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9.11 테러 사건이나, 체르노빌, 후쿠시마에 일어났던 일들, 코로나19 바이러스... 이후에도 인간이 모두 '아직 살아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자행되는 많은 일들. 그 모든 일들을 지켜보다 보면 차라리 어릴 때 상상했던 대로 세상이 한순간에 끝나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종말의 시대에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더욱 가혹하게 느껴졌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세상의 종말에 집착하며 살아왔던 걸까? 그것은 어쩌면 세상의 종말에 대한 집착이 곧 내 삶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죽고 싶지 않다'는 나의 강렬한 바람이 나를 품고 있는 세계로 확장된 것이다.  어차피 내 인생 또한 종국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끝나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인류를 구하려던 마지막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지구와 충돌할 시간이 정확히 21일 남았습니다.”



 영화  <세상의 끝까지 21일>은 소행성과 지구의 충돌이 예고되어, 지구 상의 모든 사람이 사실상의 시한부 선언을 듣게 된 직후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다. 좋든 싫든, 그들의 삶은 단 21일 뒤에 끝난다. 지구 상에 생중계되는 화면 속에는 지구 종말의 날이 D-day로 표시된다. 화면 속 숫자가 하나하나 줄어드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인류의 모습은 꽤나 다양하다. 어차피 끝날 세상이니 매일 밤 데이트 상대를 바꿔가며 마음껏 놀아보기도 하고, 생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을 찾아가기도 한다. 마음에 담아뒀지만 이룰 수 없었던 첫사랑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세상은 분명 패닉에 빠지지만, 그 패닉에는 어느 정도 조용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나오는 모두가 이렇게 순순히 그 상황에 적응하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서는 스스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패닉에 빠져 미쳐버리거나, 킬러를 고용해 스스로의 자살을 설계하는 사람들까지 나온다. 그들은 킬러에게 의뢰한다.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다가 그냥 아무 때나 기습적으로 죽여달라고. 의뢰자인 자신이 알 수 없도록. 죽음 그 자체보다, 언제 죽을지 알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그 상황 자체가 훨씬 더 큰 공포였던 것이다.


 그에 비해 아시나노 히토시의 만화  <카페 알파>에서 지구의 종말을 대하는 자세는 좀 더 커트 보니것적이다. ("so it goes.") 이 세계관의 배경은 '저녁뜸의 시대'라고 불린다.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해 인류가 붙일 수 있는 땅이 점점 잠겨가고 있고, 그만큼 그들의 세상 또한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그러나 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상황을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뭐, 어쩔 수 없지. 길이 사라지면 사라지는대로, 바닷물이 차오르면 차오르는 대로 당장 그날 그날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놀랍도록 평온하게 살아간다. 스스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존재든, 변화하지 않는 존재든지 간에. 그냥 뭐, '그런 거지' 하고 말이다. 이 만화 속의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세상 또한 그들의 세상처럼 저물어가고  있으니까.



<카페 알파> 10권 중에서


 그렇기에 지구 종말을 다룬 이런 결의 이야기들은 나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토록 천천히 늙어가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몸은 이미 각자의 종말을 대비하는 태도를 갖추고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좀 다른 종류의 이야기들이다. 예를 들어, 지구의 종말이라는 운명에 맞서 싸우는 등장인물이 나오거나, 혹은 누가 딱히 요구하지 않아도 인류의 생존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누군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나는 그런 주인공들을 볼 때마다 한 번씩 생각해본다. 나는 과연 지구의 미래를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매번 물음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인류의 종말 앞에 선 내 모습은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를 외치고 죽음을 택했던 다자이 오사무의 그것에 더 가깝지 않을까. 아무리 내 손에 전 인류의 운명이 달려 있다 해도, 나는 반드시 비겁한 길을 택하고 말 것이다.


 나 한 사람의 죽음으로 세상의 종말을 막을 수 있다 하더라도, 차라리 세상의 모두를 저승길 동무로 끌고 들어갈지언정 나는 결코 나의 목숨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살면서 크게 성공한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가족을 남긴 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하고 하찮은 삶이지만 그 비루한 삶이라도 가능한 한 며칠이라도 연장할 수 있다면 나는 그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적어도 그에 대해서 만큼은 나는 강하게 확신할 수 있다.


 




 이렇게 세상의 종말을 지극히도 두려워하면서, 누구보다도 종말에 진심인 나는 최근에도 지구의 종말과 관련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한 권 읽었다. 지난번 포스팅에도 한 번 언급했던 적이 있는 <프로젝트 헤일메리>라는 책이다. 사실 완독 한 지는 좀 됐는데, 책이 너무 좋아서 원서를 찾아서 한 번 더 읽었다. 고백하자면, 본 글의 전반부는 전부 이 책을 내가 얼마나 감명 깊게 읽었는지 소개하기 위한 빌드 업에 불과하다.


 내 브런치에 영화나 컨텐츠 리뷰를 쓰면서 잘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긴 하지만, 이 책에 대해서만큼은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 아래의 글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우주로 떠난 전직 교사이자 현직 박사인 라일랜드 그레이스 박사의 모험을 다룬 소설이다. 책 초반에 그는 나체 상태로 낯선 우주선에서 깨어난다. 우주선에 설치된 각종 기계들과 로봇들로부터 이런저런 보호와 처치를 받다가 막 깨어난 그는 왜 이 곳에 이런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는지, 자신이 누구인지, 심지어는 스스로의 이름조차 생각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기억과 관련된 것 외의 다른 지식들 - 예를 들어 과학적인 지식들 - 에는 손상이 없었기 때문에 눈치껏 익숙한 상황과 단어들을 떠올려 가면서 매일매일 서서히 기억을 조금씩 회복해 간다. 그렇게 깨어난 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그는 곧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된다.


"I’m on a suicide mission. John, Paul, George, and Ringo get to go home, but my long and winding road ends here. I must have known all this when I volunteered. But to my amnesia-riddled brain this is new information. I’m going to die out here. And I’m going to die alone."

"나는 자살 임무를 수행 중이다. 존, 폴, 조지, 링고는 돌아가지만 나는 돌아갈 수 없다. 이 임무에 자원했을 때 분명히 나도 이 사실을 알았겠지. 어쨌든 나는 여기서 혼자 죽게 될 거야."


 이 책의 독자는 대부분 이 부분에서 처음으로 충격을 받게 된다. 보통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 책의 매우 초반에 등장한 'suicide mission(자살 임무)'이라는 단어는 순식간에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든다. 그레이스 박사 또한 충격을 받았다.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있다 깨어나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를 깨달았는데, 그것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본인이 혼자 외롭게 죽어야 하는 임무라니! 그러나 이미 그는 3년에 걸친 우주여행을 왔고, 뭐 더 돌이킬 수도, 원망할 대상도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에 대해 이렇게 받아들인다.



"Okay, if I’m going to die, it’s going to have meaning."
그래, 만약 내가 죽어야 한다면, 의미 있게 죽어야지.



 비록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완전히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알고 자원한 거겠지 뭐'라는 믿음 하나로 받아들이고 바로 본인이 해야 할 작업에 착수한다. 오히려 이 충격적인 사실이 그에게 추진력을 준 듯이. 실로 <어벤져스> 멤버 토르 급의 놀라운 긍정력이 아닐 수 없다. (앤디 위어의 전 소설 <마션>의 주인공이 그러했듯이..)


 이쯤에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삶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버텨나갈 힘을 주는 것일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따르면 지구 자체가 우주적인 규모에서 보면 하나의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다는데. 지구의 규모에서 보면 한낱 먼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을 내 삶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낱 나의 삶은 무의미한 게 아닐까.


 그럼에도, 이 책의 주인공인 그레이스 박사는 멈추거나 다 포기해버리지 않는다. 장강명 소설가는 <책 한번 써봅시다>라는 책에서 '인간에게는 "지금 내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감각이 필요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쩌면 이처럼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못 말리는 본성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아예 태양계를 떠나버린 먼 지구에서라도, 누군가는 자신의 삶 혹은 죽음에 의미를 갖기 위해 연구를 거듭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그레이스 박사는 매우 우연하게도, 타우 세티를 떠돌던 다른 외계인 로키와 조우하게 된다. 그 또한 그레이스 박사와 동일한 이유로 위기에 처한 자신의 행성 에리드를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 타우 세티에 왔지만, 마찬가지로 동료들을 잃고 혼자인 상태다. 그렇게 운명처럼 만난 둘은 각자 행성에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뭉친다. 다른 기압, 다른 대기를 넘어선 그들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둘이 수행해야 했던 임무의 고결성 때문일 것이다. 그들 앞에 가로막힌 모든 언어의 장벽과 표현의 장벽을 넘을 수 있을 정도로. '나의 인류를 위해 내 한 몸 희생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Another similarity: You and me both willing to die for our people. Why, question? Evolution hate death.”
"또 다른 공통점 : 너와 나는 각자의 종족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어. 왜지? 진화는 죽음을 싫어하는데."

“It’s good for the species,” I say. “A self-sacrifice instinct makes the species as a whole more likely to continue.”
"그게 종족에게는 더 좋아. 자기희생 본능이 종족 지속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야."

“Not all Eridians willing to die for others.”
"모든 에리디언들이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하는 건 아니야."

I chuckle. “Not all humans either.”
나는 웃었다. "인간들도 다 그렇지는 않지."

“You and me are good people,” Rocky says.
"너와 나는 좋은 사람, " 로키가 말했다.

“Yeah.” I smile. “I suppose we are.”
"그래." 나는 웃었다. "우린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얼떨결에 생긴 외계인 동료와 함께 우주에서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레이스 박사는 로키와 진심 어린 우정을 나눈다. 그레이스 박사는 임무 수행 못지않게 외계 생명체인 로키에게도 큰 관심을 보인다. 엔지니어인 로키의 뛰어난 능력에 감탄하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묵묵함과 끊임없는 의지, 높은 희생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리고 로키는 정말로 많은 일들을 해준다. 심지어는 이 임무가 자살 임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많은 것을 내려놓았던 그레이스 박사를, 임무를 마친 뒤에 지구로 다시 돌려보내 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기까지 한다. 망망대해라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로 깊고 거대한 우주에서 조우한 로키는 그에게는 세상 유일한 친구이자 스승이고, 구세주가 된다.


 그리고 그 우정의 기반에는 그레이스 박사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자리 잡고 있다. 로키가 자신의 행성을 구하러 이 곳에 와서 목숨을 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도 그러하다고. 그러니 둘은 제법 동등하다고.


 그러나 이 믿음은 소설 후반부, 그가 자신의 과거의 마지막 퍼즐 - 나는 어쩌다 이 임무에 투입된 걸까? - 을 맞춰줄 충격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되며 산산조각 나 버리게 된다.


Okay.
I see how it is.
I’m not some intrepid explorer who nobly sacrificed his life to save Earth. I’m a terrified man who had to be literally dragged kicking and screaming onto the mission.

좋아,
어떻게 된 건지 알겠어.
나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고귀하게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하는 그런 용감무쌍한 용자가 아니었다.
나는 문자 그대로 소리 지르고 비명을 지르며 남의 손에 질질 끌려 억지로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버린 그저 겁에 질린 한 남자였을 뿐이다.

I’m a coward.
I’m a coward.

나는 겁쟁이다.
겁쟁이야.

I’ve known for a while that I’m not the best hope for saving mankind. I’m just a guy with the genes to survive a coma. I made my peace with that a while ago.
But I didn’t know I was a coward.

내가 세상을 구하기에 가장 좋은 카드가 아니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코마 저항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나는 겨우 이 사실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렇지만, 내가 겁쟁이였는 줄은 몰랐다.


 그는 분명 로키와 자신을 두고 "우리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지금,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단 한 가지 명분이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우주를 떠돌다 혼자 죽어야 하는 본인의 인생의 엔딩을 떠올리면 한없이 외롭고 고독했지만, 적어도 그것이 과거의 자신의 숭고한 희생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거라고 믿었다. 물론, 기억 속의 과거의 한없는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온 자신이라면 절대 이런 결정을 자발적으로 했을 리 없겠지만, 이미 이 곳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증거가 아니었겠나 생각하고 믿었다.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 상황을 겨우 받아들이고 있었던 참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결국 그는 이 곳에 본인의 의지에 따라온 것조차 아니었다. 개처럼 발버둥 치며, 기억을 일정 시기 동안 상실시키는 약물을 주입받은 채, 3년 간 코마 상태에 빠져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드디어 떠오른 고통스러운 그날의 기억 속, 그를 이 우주로 보낸 장본인이자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최고 결정권자였던 스트라트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If it's any consolation, you'll be hailed as a hero. If Earth survives this, there'll be statues of you all over the place."

"위로가 될진 모르겠지만, 당신은 영웅으로 추대될 겁니다. 만약 지구의 멸망을 막는다면, 세상 어디에나 당신의 동상이 세워질 거예요."


 그러나 라일랜드 그레이스는 영웅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는 그저 살아서 다시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들에게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이 세상이 30년 내로 종말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과거를 완전히 기억해 낸 그레이스 박사는 굉장한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인다. 그가 자신의 의지로 이 곳에 온 게 아니라는 것도, 그것도 한 때 믿고 함께 지구를 구하기 위해 헌신했던 동료의 손에 의해 강제로 약물이 주입되어 보내졌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그중에 그나마 가장 믿을만한 건 자신이 비겁한 겁쟁이였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의 그 투철했던 사명감은 다 어디에서 왔던 것일까?


 그러나 그에게는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그에게는 로키와 힘을 합쳐 해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지구로 다시 돌아가 스트라트에게 한 방 날려주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씁쓸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레이스 박사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본인이 해야 할 연구에 몰두한다. 결코 목숨을 걸고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결과적으로는 목숨 걸고 해낸다. 아마 바로 그것이 스트라트가 그를 우주로 보낸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레이스 박사를 "fundermentally a good man"이라고 일컫는다. 그레이스 박사의 겁에 질린 모습 안에 숨겨져 있는 good man을 발견한 것이, 그레이스 박사를 죽음으로 몬 당사자라는 것은 조금 아이러니하지만. 어쨌든 로키도, 그레이스 박사도 결과적으로 그들 스스로를 'good people'이라고 지칭한 게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기에 그는 마침내 지구로 돌아갈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지구로의 귀환을 포기하고 위기에 처한 로키를 구하기 위해 우주선의 방향을 다시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선택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그의 생명이 또 한 번 시험에 들었기 때문이다.


So that’s what I’m left with.
 
Option 1: Go home a hero and save all of humanity.
Option 2: Go to Erid, save an alien species, and starve to death shortly after.

내게 남겨진 옵션은 단 두 개였다.

1. 지구로 돌아가 인류를 구하고 영웅이 된다.
2. 에리드로 가서 외계인들을 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굶어 죽는다.

I pull on my hair.
I sob into my hands. It’s cathartic and exhausting.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손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지치면서도 한편 후련하다.


 결국 결심을 내린 그는 자기 대신 지구에 닥친 위기를 해결할 통신용 우주선 4개를 발송한다. 그리고 자신은 로키를 찾아 나선다. 로키를 구하고 스스로 소멸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결정을 내린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지구에 대한 미련이나, 자신의 닥쳐올 삶의 마지막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오로지 우주 한복판에서 어둠 속에 혼자 남겨져 어쩔 줄 모르고 있을 자신의 친구를 생각한다. 어쩌면 이번 생의 유일한 친구를. 그가 느끼고 있을 두려움과 막막함만을 생각한다. 그를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지루한 여정이지만, 몇 번을 실패해도 그는 계속해서 시도할 수 있다.




 그렇게 한참을 수색하다 드디어 로키를 발견한 순간, 그는 생각한다. 이렇게 순수한 희망을 느껴 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그리고 저도 모르게 환호하며 외친다.



"Yes! I'm definitely going to die!"
그래! 난 확실히 죽을 거야!



 그 순간, 그의 목소리에 더 이상의 두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소멸을 기쁘게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계도, 인류도 아닌, 오로지 절망적인 외로움에서 자신을 구해 준 단 한 사람의 소중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





 소설의 가장 마지막 장. 외계인 친구 로키를 찾아 마침내 그와 함께 에리드를 구해낸 그레이스 박사는 지구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그 행성에 머무른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어느 날, 그는 로키로부터 빛을 잃어가던 태양이 마침내 다시 그 빛을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대신 지구로 쏘아 보냈던 4대의 우주선이 정말로 지구에 도착했고, 인류의 멸망을 막아낸 것이다. 그레이스 박사는 흐느낀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외계인 로키는 그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묻는다. 그레이스 박사는 이렇게 대답한다.



" it makes my whole life have meaning."
"그 소식이 내 인생 전체를 의미 있게 만들었어."




 한 때 그저 자신의 목숨이 끝나는 것이 무서워서 울던 그레이스 박사는 결국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자, 지구를 구해낸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되었다.  


 비록 그는 지구를 구했다는 사실을 듣고서야 자신의 삶의 온전한 의미를 찾았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의 삶의 의미가 단순히 '지구를 구했다'는 단 하나의 사실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그가 로키를 만난 이후 내내 나누었던 진심 어린 우정과, 스스로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지구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던 여정 모두에도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겁쟁이였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인 것조차도.


 무엇보다, 그와 로키는 서로를 발견했다. 서로 각자의 별에서 빛의 속도로 여행해도 몇 년은 떨어져 있는 머나먼 타우 세티에서 말이다.


“You and I found each other. That’s something.”
“Yeah,” he says. “It really is something.”


 결국 삶의 의미란 모두가 찾아 헤매는, 혹은 추구해야 하는 엄청나게 숭고하고 특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비록 둘 사이의 대기를 가로막는 두꺼운 보호벽이 없이는 한 순간도 서로에게 직접 닿을 수 없더라도, 벽 너머로 주먹을 맞댄 채 그렇게 서로를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삶 전체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비로소 의미를 찾는 순간 또한 바로 이런 사소하고도 소중한 순간 순간들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렇기에 그는 다시 지구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져도 떠나지 않고, 모든 것이 낯선 것으로 둘러싸인 머나먼 행성 에리드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자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닐까. 일단 지구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야말로 우주적 스케일의 영웅 취급을 받을 텐데도 말이다.  이유는 다시 혼자 우주로 떠났을 때 스스로에게 찾아올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어서일 수도 있고, 돌아가면 2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을 지구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어서, 가서 다시 적응해서 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커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그런 소심하고 비겁한 면모가 있어서 좋다. 그는 지구 종말을 다룬 여느 어떤 컨텐츠의 인물보다도 진실로 찌질하고, 겁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영웅이기도 하다. 자신이 한 일의 결과와 직면하는 게 두려워서 도망쳤을지언정, 자신이 해야 할 일로부터는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두 세계를 구한 것은 결국 그의 비겁함이다.


 세상을 구하는 비겁함이라니. 때로는 그런 비겁함도 사랑스럽지 않은가. 인간이니까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지구를 위해 죽을 마음이 1도 없는 나로서는 그래서 오히려 그레이스 박사의 선택을 존중하게 된다. 그가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다시 희망을 찾은 세상은 우주 건너편에서 그를 향해 Hail하고 있을 테니까.




+


 'LIVE THE DAY', 즉 '오늘을 살라'는 말은 뻔하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서서히 소멸을 향해 가는 모든 인류가 다가오는 종말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10년 전의 어느 날, 식당의 테이블에서 보고 찍어두었던 문구.





지구 종말에 대한 3가지 이야기.






매거진의 이전글 오직 야망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