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프로그램 중에 <도전! 용암 위를 건너라!>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은 용암을 연상하게 하는 붉고 뜨겁고 기름진 액체 30만 리터가 채워진 세트장을 무사히 가로질러 출구에 도달해야 한다. 각 세트장은 서재, 침실, 주방 등 일반적인 미국 가정집에서 볼 수 있는 컨셉의 공간으로 꾸며져 있는데, 참가자들은 소파, 서랍, 테이블 등 각 공간에 놓인 가구들을 활용하여 출구까지 이동한다. 그들의 발밑에서 보글보글 끓어 넘치고 있는 용암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서.
도전! 용암 위를 건너라(Floor is Lava) 예고편
처음 이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혼자 저녁을 먹을 때 한 두 편씩 볼 짧은 예능 프로그램이 하나 필요했던 것뿐이니까. 나는 이 프로그램의 작고 귀여운 1만 달러의 상금과 함께 건네어 준다는 용암 모양의 허접한 트로피 하나 (심지어 ALL 팀전인데 한 개만 준다...) 만큼이나 소소한 마음으로 시청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 뭔가 이상하단 말이다. 그저 용암으로 가득한 방을 탈출하는 포맷일 뿐인데, 반복해서 봐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몸 좋고, 자신감에 넘치며, 다양한 관계성을 띈 참가자들이 매주 용암 위를 건너겠답시고 뛰고 또 뛰는 모습을 보는 게 생각보다 꽤 재밌더라. 결국 2주 만에 넷플릭스에 등록된 모든 에피소드 정주행을 완료하고 난 뒤에는 한동안 '시즌 2 안 나오나..?' 하고 인터넷을 뒤져보기까지 했다.
'어떻게든 출구에 도달한다. 단, 바닥은 용암이다.'
최근 내 머릿속이 이래저래 복잡해서였을까. 비록 현실은 아닐지라도, 이 프로그램이 던지는 단 두 줄의 극한의 명제가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용암 앞이라니. 누구라도 살면서 스스로를 이렇게까지 밀어붙일 일은 많지 않다. 이 프로그램에 도전했던 수많은 참가자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용암으로 가득 찬 방에 들어가는 순간 그들은 모두 그것이 가짜 용암인 걸 알더라도 진심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도전하다 떨어진다고 그들의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고작 1만 달러의 상금을 받지 못하고 좋은 추억만 안고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이 안에서 '뛸까, 말까', '버틸까, 말까'를 고민하는 순간만큼은 그들은 무엇보다도 진심이 된다. 바닥에 넘쳐흐르는 용암의 존재 때문에.
내가 이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봤던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이 프로그램은 비록 가공의 상황 속에서지만, 그 순간만큼은 삶에 진심이 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연하다. 발 밑에 펄펄 끓어오르고 있는 용암 앞에서는 가면을 쓸 수도, 허세를 부릴 수도 없다. 같이 팀을 짜 온 동료와 가족, 친구들 앞에서 모든 밑천이 드러나 버린다. 용암에 빠지고 싶지 않아 버둥거리는 마음도, 출구까지 건너가 무사히 이 방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도 모두 진심이다.
호기롭게 도전한 것까진 좋은데, 막상 눈앞에 펼쳐지는 세트장의 비주얼에는 경악하게 된다.
눈앞에 닥친 위기 앞에서 참가자들은 놀라고 있을 새가 없다. 방을 빠져나가려면 어떤 방향으로든 팔과 다리를 뻗어야 한다. 기름진 용암이 쓸고 간 자리여도, 자신의 도약력을 믿을 수 없어도, 잘 착지하지 못하고 미끄러질 것 같아도. 온갖 경우의 수를 머릿속에 넣고 계산해봤자 제한시간만 지나갈 뿐이다. 눈을 감고 뛰든, 뜨고 뛰든, 결국은 누구나 한 번은 자신을 믿고 도약해야 한다. 영화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 에서 나왔던 'A leap of faith(자신을 믿고 뛰는 것)'를 시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약이 성공하는 순간, 용암에 빠지지 않은 자신을 발견한 참가자의 얼굴에 비치는 환희와 자기 확신의 표정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내가 해냈어!'라는 자신만만한 표정이든, '이게 되네?' 하는 얼떨떨한 표정이든. '일단 한번 던져봤는데 죽지 않고 살아났다'라는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이 가득한 그 순간들은 비록 용암 비슷한 것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는 안전한 방 속에서 그들의 모험을 관람하는 이 방구석 히키코모리에게도 짜릿한 감동을 안겨주니까.
그리고 그 한 번의 성취가 두 번째, 세 번째 성취로 이어지며 점점 참가자들의 눈에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불타오를 때. 두려움과 경악으로 가득했던 표정이 점차 이런저런 장애물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여유를 찾아갈 때. 용암에 대한 두려움을 마지막까지 떨쳐내진 못하더라도, 막판에 출구에 도달하는 그들의 표정에는 방에 입장하기 전과는 확연히 다른 온전한 즐거움과 성취감이 가득하다.
아마도 용암을 건너겠다는 도전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절대 그런 느낌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그야말로 '정면 돌파'를 선택한 자들만이 맛볼 수 있는 짜릿한 감정일 테니까.
나는 종종 이 프로그램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저 장소에 있었다면 저 용암을 뛰어넘을 수 있었을까?"
나 또한 지금 화면 안에서 펄쩍펄쩍 뛰는 저 진심 어린 사람들처럼 진심이 되어볼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체력도 약하고 아픈 것도 싫어해서 몸으로 퍽퍽 부딪히는 것도 아마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용암 앞에 선 그들의 모습이 부러웠다. 등 떠밀려서라도 진심이 되어볼 수 있는 상황에 몰려본다는 것이 부러웠다.
최근의 나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엇에든 진심이 될 수 없는 나에 대한 답이 없고도 깊은 불안이었다. 내게는 수많은 선택지가 주어져 있었지만, 발 밑에 용암은 깔려 있진 않았다. 무엇을 선택해도 절반은 갈 것 같다는 애매한 안락함이 안전망처럼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런 상황이기에 나는 어느 선택지에서도 진심이 될 수 없었고, 어느 쪽으로도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 언제까지고 서 있어도 되었다. 용암이 깔려 있지 않은 나의 도전에는 제한 시간이 없었기에.
나는 한참을 어디로도 움직이지 않고 오도카니 서서 생각에 생각만 거듭하고 있었다. 손 발이 묶인 상황에서 자꾸만 걱정만 늘어갔다. 나는 언제나 생산적인 걱정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고 미리 대비책을 플랜 B, C까지 마련해두지 않으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용암 위에 서서 무작정 점프하고, 매달리고, 우스꽝스럽게 미끄러져 넘어지고, 부딪히는 사람들을 보고 나니까 이번엔 그냥.. 일단 한번 해보고, 나머지는 닥치고 나서 생각해봐도 좋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나도 살면서 한 번쯤은 그렇게 해볼 수 있잖아.
살다 보면 때로는 퀀텀 점프와 도약이 필요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럴 땐 발 밑에 용암이 있다 하더라도 일단 뛰어야 한다. 어쨌거나 발을 뻗어보기 전엔 알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 넘어지든, 떨어지든 용암에 빠지든 일단은 한 걸음 던졌다는 데 의미가 있는 순간들 말이다.
정면 돌파. 내 인생에서 살면서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던 그 말을, 한번 시행해볼까 한다. 나 스스로를 가상의 용암이 가득한 방에 몰아넣어서라도, 나의 진심을 끌어내 보려고 한다. 내가 선택한 이 길로 인해 비록 앞으로 내게 닥칠 상황이 호락호락하진 않겠지만, 나는 그것을 내 삶의 용암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어쨌거나 바닥은 용암이고, 나는 이 상황을 건너가야 한다. 나를 믿고 내딛는 한 번의 도약으로 도전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