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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May 19. 2021

뭔가에 매달릴 필요는 없지만, HODL

매달리면 인생이 좀 쉬워지기는 하니까.

   

 지난번 포스팅에 언급했듯이, 최근 나는 <프로젝트 헤일메리>라는 책을 읽고 있다. <마션>을 썼던 앤디 위어의 신작으로, 어느 날 갑자기 태양에 나타나 태양의 에너지를 떨어트리고, 지구에 급속한 빙하기를 유도하는 '아스트로파지'라는 정체불명의 물질로부터 지구를 구하기 위해 우주로 자살 미션을 수행하러 떠난 한 과학 교사의 이야기다. 이 책의 첫 장에는 인상 깊은 문장 하나가 나온다.


"뭔가에 매달릴 필요는 없지만, 매달리면 인생이 좀 쉬워지기는 하니까.
I don't need something to hang on to, but it sure makes life easier."



 이 부분을 읽자마자, 나는 나도 모르게 최근 이런저런 일들에 치어 한동안 잊고 지냈던 취미를 떠올렸다. 한동안 내 인생의 가장 큰 축이었고, 나의 첫 책 <일단 한번 매달려보겠습니다>의 소재이기도 했던 그것, 바로 클라이밍이다.


오랜만이죠?


 2020 도쿄 올림픽을 기대하며 나름대로 야심 차게 출간했던 내 첫 책은 오직 클라이밍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지만, 목차를 보다 보면 하나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주제의 글이 끼어져 있다. 바로 '내가 주식 투자에 빠진 이유'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책을 읽던 독자들 중 몇몇은 이 부분에서 사실 조금 당황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한창 클라이밍 얘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주식 투자 얘기가 튀어나오다니? 그러나 나는 그만큼 클라이밍과 주식투자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본질적으로 닮아 있는 존재라고 느꼈다. 그 둘은 당시 내 인생을 지탱해 주던 큰 두 축이었고, 각각을 마주하는 내 태도가 상당히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더 잘 알어야 하는 것. 끊임없는 자기 수행이나 다름없는 과정을 즐겨야 하는 것.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정답을 찾아야 하는 것.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일단 한번 매달려보는 것.



뭐가 됐든, 내가 할 수 있든 없든. 매달려서 버티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매일 시도해 볼 수 있는 작은 모험, 도전, 실패, 그리고 성취를 경험하는 것. 그래서 심지어 나는 이 챕터를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이 써두기도 했던 것이다.


고작 첫 번째 책 내면서 두 번째 책 예고하기 ㅋㅋㅋ






 최근 일주일간 국내장이든 미국장이든 코인이든 장들이 다 좋지 않았다. 지난번 글에서 호기롭게 '안 속고, 안 판다'고 선언은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멘탈 돌려막기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일제히 빠질 땐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의기소침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연휴인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문득 <프로젝트 헤일메리>에서 봤던 그 문장이 생각났다. 그러자 암장에 가서 뭔가에 한번 매달려보고 싶어졌다. 작년에 정작 책을 낸 이후로 꽤 오랫동안 매달리러 가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생각난 김에 오늘 오전 일찍부터 암장에 갔다. 암장에 들어서자마자 잘 세팅된 깨끗한 암벽이 알록달록한 홀드들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오랜만의 방문이라서였을까, 어딘지 떳떳하지 못하게.. 뻘쭘하게 암장에 들어서는 나를 보며, 그들은 '왜 이제야 왔냐'고, '넌 왜 꼭 뭔가 잘 안 풀리거나 심란할 때만 우리를 찾느냐'고 일제히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 하필 그들의 이름이 '홀드 HOLD'인 것도, 이런 날은 꼭 운명인 것만 같다. 오랜만에 매달린 벽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지 않도록 홀드를 손으로 바짝 쥔 나는 마치 그것이 하락장에 정신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 HODL(*Hold On for Dear Life의 약자. 영미권 투자자들이 주로 쓰는 밈으로 'HOLD'의 의도된 오타이며, '존버'를 의미함.) 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주선 안에서 3년 간 코마 상태에 빠졌다가 일어난 몸으로 어색하게 움직여 겨우 사다리를 붙잡으며 '뭔가에 매달리면 인생이 쉬워지긴 하니까'라고 생각하는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그레이스처럼 말이다. 오랜만에 한참을 매달려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나는 생각했다.



그래, 뭔가에 매달릴 필요는 없지만,
확실히 매달리니까 뭔가 기분이 좀 가벼워지긴 하네.


 인생이 쉬워지는 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난 그레이스처럼 극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 이 정도로도, 나는 분명 좀 더 괜찮은 마음으로 버텨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쭉 투자하는 클라이머이자 클라이밍하는 투자자로 열심히 살아가기 위하여. 일단은 오늘도 나는 어딘가에 매달린 채, HODL을 외쳐보는 것이다.


출처 : https://twitter.com/luchopolettiart/status/936048718662586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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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헤일메리>는 사실 이전 글에 말했던 대로 '뭔가 우주항공 섹터와 관련하여 투자에 도움이 될만한 발상이 있을까?' 싶어서 읽기 시작한 것이긴 한데, 정작 그런 내용보다는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버티는 주인공 그레이스의 유머감각과 의지에 더 많은 인사이트를 얻는 것 같다. 이 무시무시한 하락장에서 나처럼 '닥치고 HODL'이라는 포지션을 취했을 우주 어딘가의 동지들을 위해, 내게 투자자로서 기꺼이  존버할 용기와 영감을 준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문장을 여기에 남겨본다. (아직 절반밖에 못 읽은 건 함정...)




"사태가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누군가는 계속 우유를 배달해야 한다. 그러다 맥크리디 부인의 집이 밤에 폭격을 당한다면 뭐, 그 집은 배달 고객 명단에서 지우는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문다. 두 주먹을 꽉 쥔다. 엉덩이에도 힘을 준다. 힘 주는 방법을 알고 있는 온몸의 모든 부위에 힘을 준다. 그러자 내게 통제력이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나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뭔가 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비정상적인 것을 받아들여 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가끔은 우리 모두가 싫어하는 일이 일 처리를 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넌 살아 있잖아. 여기에 있고. 아직 포기하지도 않았어."   



좋아하는 거 다 모아놓고 찍기♡ for 인서타



※ 헤일메리 :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주 낮은 성공률을 바라보고 적진 깊숙이 내지르는 롱 패스를 뜻하는 미식축구 용어.

참고 : 헤일 메리는 미국 속어로 이판사판으로 던져보는 최후의 수단을 뜻하기도 한다. 한국 인터넷용어로 치면 풋볼판 기도메타인 셈 (출처)



인스타그램 : @100.fire.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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