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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Aug 30. 2020

왜 맘대로 살지 못하니

인생 네 거잖아, <오늘도 평화로운 (2019)>



 2018년,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 방문했을 때였다. 바깥 행사장에 즐비해 있던 영화 포스터들 중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한 장의 이미지가 있었다.


다시 봐도 강렬하다..


 머리 한가운데를... 정말로 민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최대한 아름답게 포장한 저 충격적인 비주얼과 타이틀을 보니 엄청난 호기심이 생겨났다. 비록 당시에는 저 영화를 보고 오진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저 충격적이었던 포스터가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자꾸 아른거리며 생각나기에 ‘영화 개봉하면 꼭 봐야겠다’ 고 다짐하고, 간간히 영화 타이틀을 검색하며 기다렸다가, 결국 네이버 시리즈에 올라오자마자 바로 결제해서 보았다.


 결과적으로 영화의 주인공은 정말 머리 중간에 고속도로를 낸 게 맞았고, ‘보이스 피싱으로 맥북 사기를 당한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직접 그들의 본거지인 중국으로 건너간다’는 내용은 뻔할 것 같으면서도 연출이 충격적이었다. 애초에 B급 영화를 별로 즐겨보지 않아서인지 처음에는 영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서 ‘와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지?’ 하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중반부의 사자성어 시퀀스 이후로는 어이가 없는 나머지 ‘아 이거 그냥  SNL 콩트라고 생각하고 봐야겠다’ 하는 식으로 억지로 납득하고 보니 허탈함인지 어이없음인지 모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저씨>부터 <테이큰>, <매드 맥스>에 이르기까지 온갖 명장면을 B급도 아닌 C급으로 패러디한 장면들을 보면서 왠지 모를 장인 정신마저 느꼈다.



저가 코스프레 장인님이 떠오르는 현란한 패러디들이란...!


 특히 마지막의 액션 씬에서는 입도 제대로 다물지 못하고 봤다. 좋은 의미에서도, 나쁜 의미에서도 경악스러운 작품이었다. 심지어, 영화를 다 본 직후 내가 한 행동은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재생하는 것이었다. 마치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단 한 번 스쳐 지나갔을 뿐인 저 꽃분홍색 포스터가 나를 오래도록 놔주지 않았던 것처럼, 이상하게도 나는 이 묘한 영화의 여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후로도 나는 몇 번씩 생각날 때마다 이 영화를 다시 돌려보았다. 이 영화에 대한 내 왓챠피디아의 별점은 3.5점이었지만, 나는 4점 이상을 줬던 영화들보다 이 영화를 더 자주 봤다. 아무 생각 없이 보기 좋았기 때문일까, 하여튼 삶이 우울하고 뭔가 잘 안 풀린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냥 시시껄렁한 뭔가가 필요할 때마다. 지겨울 때마다 습관처럼 재생을 눌렀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그동안 그렇게 이 영화를 자주 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 하나 외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영화 내에 외우고, 적어두고 싶은 멋진 대사 한 줄 없다. (정말로 기억에 남는 대사가 진짜 단 한 줄도 없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음악’이다. 이 영화는 저예산 영화라 전반적으로 음악이 깔리지 않는 조용한(?) 영화이지만,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본격 ‘특훈’하는 씬과 실제 액션씬에서 강렬한 록 사운드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심지어 마지막 액션 씬에서 흘러나오는 ‘한양 부기’는 아예 가수가 그 액션 씬 현장에서 노래를 부른다. 매드 맥스가 따로 없다)


 그런데 이때, 어이없을 정도로 코믹한 화면을 배경으로 깔리는 가사들이 하나같이 기가 막히다.






<영웅이 필요해> - 플라잉독

https://youtu.be/WKurpdFeZMs


세상 사람 모두 다 잘못된 것만 찾아내
자긴 잘할 생각 없이 남들이 보는 눈만 생각해
계획이나 꿈도 없이 내 생각은 중요치 않아

왜 맘대로 살지 못하니 인생 네 거잖아?
왜 남들 눈만 생각하니 인생 네 거잖아?

남들이 하는 건 다 해야 해 내 생각은 중요치 않아
뒤처지면 실패한 인생 나랑 다른 건 인정 못 해
왕따를 만들어 버려야 해 독창적인 건 필요치 않아?

왜 맘대로 살지 못하니 인생 네 거잖아?
왜 남들 눈만 생각하니 인생 네 거잖아?

오~ 용기가 필요해 오~ 모험이 필요해
오~ 노력이 필요해 오~ 영웅이 필요해




<한양 부기> - 플라잉독

https://youtu.be/CcAdOM0h6Rg


내 오른손을 들어 태양을 가리고 왼손을 들어 내 눈을 가려
어려운 문젠 덮고 자극된 것만 찾아 우린 점점 더 바보가 되고 있소.

여길 봐도 같고 저길 봐도 같아 생긴 것도 같고 생각도 같아
기계로 찍어 낸 것처럼 모두 같아 우린 점점 더 바보가 되고 있소

꿈은 상관없이 돈만 생각하다 바보가 되고 말지  네가 병신이라 그래
노력은 하지 않고 쉬운 일만 찾다 남 탓만 하게 되지 네가 병신이라 그래

일 잘 풀리면 내 탓 안 풀리면 남 탓 이기는 편 내편 지는 편 네 편
잘 나가는 사람 옆에 딱 붙어서 손바닥 지문 닳도록 싸바싸바

꿈은 상관없이 돈만 생각하다 바보가 되고 말지 네가 병신이라 그래
 노력은 하지 않고 쉬운 일만 찾다 남 탓만 하게 되지 네가 병신이라 그래





“네가 병신이라 그래”



실제로 누가 내 앞에서 저 말을 하면 ‘뭐라고?’ 하고 발끈할 것 같은 말인데, 밴드 보컬이 웃는 낯으로 불러서 욕처럼 안 느껴지는 걸까? 대놓고 노래한답시고 가사를 빌려 저렇게 듣는 사람한테 욕을 하는데, 이상하게 들으면서 별로 기분이 안 나쁘다. 오히려 뭔가 후련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애써 모른 척하고 있던 내 찌질한 모습을 다 까발려주는 느낌이랄까?



 “꿈은 상관없이 돈만 생각하다 바보가 되고 말지”

 “노력은 하지 않고 쉬운 일만 찾다 남 탓만 하게 되지”



 이렇게 <한양 부기>와 <영웅이 필요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보는 관객들한테 ‘맞말’ 돌직구로 공격을 날리지만, 그것은 오히려 ‘뼈 때리는’ 비난이라기보단 시니컬한 형식을 빌린 위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흥겨운 선율에 걸걸한 딕션으로 귀에 따박 따박 들어와 박히는 가사를 듣고 있자면, ‘그래.. 맞는 얘기긴 해... 내가 병신이라 그랬나 보다..’ 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내가 뭐라고, 나는 고작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인데.. 지금 내가 이렇게 괴로운 것은 다 내가  병신이라 그런 거구나! 하고 껄껄 웃으며 생각하게 된달까.


 스스로 내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고, 자의식이 비대해지면 비대해질수록 인생이 힘들어지는 게 맞는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타인과의 비교에 따라 ‘이 정도는 해야 해’라는 수준으로 높아지고, 그걸 따라갈 수 없는 자신에 대해 열등감이 자꾸만 쌓여갈 때. 남들이 하는 건 다 해야 하고, 뒤처지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 인생은 불행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OST로 차용된 이 두 곡이 정말 좋다. 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달까.




 “병신 같고, 남들에 비해 뒤처지는 것 같아도,
그건 어차피 네가 병신이라 그렇고,
어쨌든 인생은 네 거잖아. 네 맘대로 살아.”
 





 때로는 어떤 긴 글이나 책 보다 짧고 압축적으로 쓴 노래 가사가 더 깊은 울림을 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질 때마다 이 영화를 종종 재생하는 것이 아닐까. 알고는 있지만, 남의 말로 듣고 싶어서. 내가 병신이라는 것을 남의 말로 확인받고, 어이없게도 그로부터 시니컬한 위로를 구하기 위해서.


그러니 남의 맥북과 애인과 에스프레소 한 잔을 과하게 부러워하지 말자. 인생 네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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