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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Apr 26. 2021

용두사미여도 괜찮아

글쓰기의 부담을 덜어주는 마스다 미리의 힘


 최근 마스다 미리의 에세이 <그런 날도 있다>를 읽었다. 이 책은 그녀가 아직 30대 중반이었을 무렵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녀의 글들이 하나같이 무척 간결하고 짧게 끝난다는 것이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판형의 책의 2, 3 페이지면 한 편의 글이 끝나버리니, 아마도 A4용지로 치자면 한 장도 다 채우지 않는 길이인 것 같다.


 짧고 간결하게, 군더더기 없이 쓴다는 것.


 그것은 대체로 나의 글쓰기에서는 불가능한 미션이었기에, 나는 더욱더 그녀의 글에 부러움을 느꼈다. 그녀의 글은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쓴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는 사람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정교하게 디자인된 것일 거다.


 그저 가끔씩 브런치에 끄적일 뿐인 아마추어 작가인 나는 아무래도 저런 치밀한 작업에 익숙하지 않다. 글을 쓸 때면 이런저런 하고 싶은 말이 중구난방 뒤섞여 글이 좀처럼 정돈되지 않는다. 혹시라도 내 설명이 부족해서 읽는 사람들이 내가 느끼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할까 봐 글을 빽빽하게 쓰고, 이런저런 설명과 수식어를 덕지덕지 덧붙이느라 구구절절 길어져 버리기도 한다. 나의 글에는 마스다 미리의 글과 같은 편안한 여유는 없다. 그런 스스로의 글의 단점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어서인지, 나는 한 편의 글을 쓰기 시작할 때면 언제나 부담을 느낀다.


 나의 연재 주기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내가 대체로 그 부담감을 심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1시간만 짧게 써야지' 하고 시작한 글의 작성 시간은 어느새 3시간, 4시간으로 불어나 예상했던 마무리 시간을 훌쩍 넘겨버리고 만다. 중간에 멈췄다 다음날 다시 써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시작하지만, 언제나 '조금만 더' 쓰면 끝이 보일 것 같아서 결국 끝까지 써버리고 만다. 그러면, 그 날은 다른 계획한 일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한 번 시작하면 나의 저녁시간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글쓰기가 무서웠다. 그리고 가끔씩은 그런 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그 부담감을 똑같이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같이 긴 글을 읽지 않는 시대에, 누군가의 피드에 나의 구구절절한 글이 뜬다면 아마도 숨이 막히지 않을까? 그렇게 누군가에게 부담을 줄 거라면, 이것은 차라리 자기만족으로 끝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 책은 매번 '이번에는 짧게 써야지'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글을 시작하면 하염없이 길어져 고민인 내게 좋은 자극이 되어주었다. 그것은 그녀의 에세이가 탁월해서도, 내 심금의 뭔가를 울리는 멋진 문장들이 넘쳐나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대단한 글이었다면, 나는 그 글과 내가 쓴 글을 비교하면서 한없이 주눅 들고, 글쓰기에 대한 더 강한 부담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의 글은 오히려 정반대에 가까웠다. 대부분 2007년에 쓰여졌다는 그 글들은 14년이 지난 지금도 어딘지 모르게 미완성된 초고 같은 느낌을 준다. 읽다 보면 자주 '어라, 이게 끝인가?'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니까.  


 그만큼 그녀는 이 책에 실린 어떤 글에서도 완벽한 결론을 제시하려고도, 불필요한 설명을 덧붙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있었던 일과 그 당시에 느낀 감정을 솔직하고 투박하게 기록할 뿐이었다. 심지어는 왜 이 글을 쓴 건지 주제가 뭔지 모르겠는 글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글들은 모여서, 한 권의 책이 되어 내 손에 들려있다. 그녀의 설렁설렁한 글들은, 늘 최대한 성실하고 되도록 꼼꼼하게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며 압박을 느껴왔던 내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비어 있으면 그냥 비어 있는 채로 둬.
꼭 뭔가 완결이 없어도 괜찮잖아.'



 급하게 중간에서 툭 끊는 것 같아도. 어쩐지 완벽한 마무리가 아닌 것 같아도. 내가 느낀 점이나 교훈 같은 게 없어도. 이건 어차피 교과서도 아니고, 문학상을 받을 글도 아닌데 뭐 어때? 어차피 내 이야기인데.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그래서일까, 그녀의 글을 읽는 것이 하나도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은. 밑줄칠 만한 문장 하나 없이 그저 시시덕거리며 읽을 수 있었던 그녀의 에세이들은 정말 별로 특별할 것 없었기에 오히려 내게 자극을 주었다. 오랜만에 마음의 힘을 풀고 즐겁고 순순하게 읽히는 글들을 보며, '아, 나도 한 번 이렇게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최근, 블로그나 브런치를 넘어 뉴스레터를 꾸준히 글을 쓰기 위한 플랫폼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아마도 이 영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 <부지런한 사랑>을 쓴 이슬아 작가일 것이다. 그녀는 매일 구독자들에게 한 편의 글을 써 보낸다. 그런 스스로를 '연재 노동자'라고 표현하면서.


 일주일에 한편, 두 편도 부담스러워서 쓰기 전까지 몇 번이나 컴퓨터를 켤지 말지 고민하고, 글을 쓰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고, 딴청을 피우는 내게. 일정한 주기로 부지런히 그 부담을 이겨내며 글을 쓰고, 보내는 작가들의 '부지런한 사랑'이란 얼마나 위대해 보이는지. 그들은 어쩌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글쓰기의 부담을 이겨내기 위해, 최대한 가볍게 시작하는 법을 터득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매일 혹은 매주, 독자들에게 글을 보내기 위해서는 일단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특정 시점에는 반드시 컴퓨터를 켜고 글을 쓰기 시작해야 하니까.


 사실 따져보면 내가 쓰는 글들의 대부분은 반응이 변변치 않다. 무엇보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그러니 당연히 나에 대해 나만큼 궁금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 글이 자꾸만 구구절절 길어지는 것 아니겠나. 애초에 내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정도의 유명한 인물이었다면, 이렇게 내 생각을 자세히 손가락 아프게 설명해야 할 필요도 없었을 거다.


 그러니 나도 좀 더 가볍게 써봐도 되는 것 아닐까? 꼭 마무리짓고 완성하지 않아도. '에게, 이게 끝이야?'라는 소리가 나오더라도 말이다. 그러니 난 앞으로 이런 짧은 글을 지향하면서 써볼 것이다.


시작은 창대했지만 그 끝은 미약하더라도 일단 뭐라도 썼다는 데 의의를..

 

 비록 이런 용두사미 같은 글이라 해도. 어쨌든 뭐라도 쓴 것이, 아무것도 안 쓴 것보단 낫지 않을까.


 그러니 앞으로 혹시 글 쓰다 슬럼프에 빠질 것 같을 땐 종종 이 책 아무 데나 펼쳐서 한 편의 에피소드를 읽어야겠다. 다 읽는데 3분도 걸리지 않는 글을 읽고 나면, 왠지 모르게 내게도 가볍게 쓸 용기가 다시 샘솟을 것 같으니까.





+


 책을 읽고 최근 며칠간 연습삼아 짧은 글 몇 개를 써봤다. 일부러 즉흥 연주처럼, 의식의 흐름대로 한 번에 쭉 이어 쓰면서 세세하게 다듬지는 않으려 했다. 그중 몇 개를 하단에 첨부해 본다.




1. 몸 가는 데 마음 간다

 

 어제 새벽까지 쥐어짜며 글을 쓰느라 허리도 아프고 체력도 고갈 상태. 오늘만큼은 식당일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꾸역꾸역 나와서 몸을 움직이다 보니 기분도 컨디션도 좀 나아졌다.


 식당 타이쿤 게임의 캐릭터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며 일하다 우연히 손님으로 오신 친구 어머님을 마주쳤다. '~ 어쩌면 좋아~'하면서 까르르 수다 떨고 연속 서비스 폭탄으로 배를 채워드렸더니 아직 일하느라 밥을 한 끼도 먹지 못한 내 속까지 배부르다.


 방금 전엔 가게 언니들이 이거 마시면 날씬해진다며 미에로화이바를 한병 주셨다. 날씬한 몸매를 기원하며 다 같이 병째로 원샷! 이게 소소한 행복인 거겠지.


 아무래도 식당일이라는 게 계속 움직이고, 다른 사람들 보며 구경하고, 큰 소리도 내야 하다 보니 여러모로 내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오늘 충전된 이 에너지를 이따 집에 가서 글 쓸 때 다시 써먹어야지.




2. 의자와 글쓰기의 상관관계


 코타츠에 앉아서 글 쓰는 건 확실히 허리에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싸고 좋은 의자를 산다고 해서 내가 정말 좋은 글을 쓸까?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단 말이지.




3. 타인의 삶


 나중에 우리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다던 남자가 있었다. 내가 그의 뮤즈라나.


 나는 헤어지면 휴대전화에 연락처도 남겨두지 않고, SNS도 철저히 차단하기 때문에 지금 그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서점에 상당히 자주 가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 시야에 그가 썼다는 소설은 들어오지 않았고, 그가 소설가로서 성공했다는 소식 또한 아직은 듣지 못했다.

 

 그러니 그가 그때 말했던 대로 나에 대한 소설을 썼을지 안 썼을지는 모른다. 다만 예전에 우리가 함께 했던 시절엔 그의 그런 다짐을 낭만으로 받아들였다면, 지금은 불쾌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미 우린 헤어졌고, 그가 나를 소설 속의 어떤 캐릭터로 이용해 먹는다 해도 나로서는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다. 그저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가 나와 헤어진 이후에 그의 영감을 자극하는 또 다른 뮤즈를 만나, 전대의 뮤즈였던 나의 존재를 까맣게 잊을 정도로 현재 진행형의 사랑에 몰입하고 있는 상황뿐이다. 혹은, 현실의 무게에 치어 소설가라는 꿈을 기어이 포기했거나.


 소설가들이 모티브라는 핑계로 타인의 삶을 훔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관련하여 최근 출판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보면, 이제는 독자로서 저자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소설이라던가, 소름 끼치도록 현실적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한국 소설책을 선뜻 집기가 망설여진다. 요즘 SF소설이 각광을 받는 것도, 어찌 보면 이런 불편한 일들로부터 안전할 가능성이 높아서가 아닐까. 아예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라면 누구의 삶도 기억도 그대로 재현할 순 없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차라리 외국소설과 세계명작 같은 고전 소설을 좋아한다. 어차피 내가 소설에 바라는 것은 리얼한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그냥 누군가가 지어내서 들려주는 재미있는 한 편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4. 인싸력 총량의 법칙


 우리 집 식구들 중에선 아버지가 제일 인기가  많다. 아마도 나와 내 남동생이 여태까지 만났던 이성의 수를 총 합쳐도 아버지가 여태껏 만난 이성의 수에 견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나와 내 남동생은 둘 다 꽤 오랜 기간 싱글이고, 아버지는 인기남이었던 본인의 자식들이 한창나이에 이렇게도 이성으로부터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아무래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듯하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가 우리 가족의 인싸력을 다 가져간 게 아닐까 싶다. 우리 가족이 만날 수 있는 이성의 수가 정해져 있는데, 한창때의 아버지가 그걸 독식한 거지.


 그래서 우리 세 식구는 언제까지 각자 혼자 살게 될까?



5. 새에게서 배우는 장수의 비결


 2010년대에 태어난 우리 집 할배새들은 2021년에도 여전히 건강히 잘 살아 있다. 얘들의 1년이 우리에겐 10년이니, 인간으로 치면 한 세기를 넘긴 셈이려나. 딱히 뭐 특별한 걸 먹이지도 않는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건강한 것일까 가끔 나도 의문이 들긴 하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집에 있을 때는 그들을 항상 풀어두기 때문인 것 같다. 마음껏 날아다니고, 똥도 아무 데나 싸고, 같이 사는 사람은 내리깔아보며 맘껏 무시하고.

 딱히 먹을 것 걱정 없고, 잠잘 곳 걱정 없고, 심심하면 인간한테 가서 쿡쿡 찔러보고 쓰담쓰담 애정 확인이나 받고. 지겨워지면 털 정리하고 목욕하고 그냥 잔다.


 사실 본인이 원할 때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아무 데나 똥을 퍼질러 쌀 수 있다는 것, 그게 최고의 장수 비결 같기도 하고.




6.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저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가능성을 그저 가능성으로 낭비하며 살아가면 안 되는 건가요?



 


이거 봐. 짧게 쓴다고 썼는데, 또 길어졌잖아. 스크롤 크기 어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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