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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May 04. 2021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 본 이유

내 어머니의 생일은 언제인가


나의 어머니는 열아홉의 나이에 나를 낳았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나를 매우 싫어했으며, 그 사실을 구태여 숨기지도 않았다.


 항상 나를 괴롭혔고, 내 존재를 숨기고 부정하고 싶어 했으며, 나를 증오하고 저주함으로써 자신의 잃어버린 젊은 날들을 후회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자신의 젊음을 누릴 기회를 통째로 앗아가 버린 나이 많은 남편에 대한 증오를 딸인 나에게 풀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매우 천진한 어린 여자이기도 했다. 밖에서 만나는 모두가 그녀를 밝고 사랑스럽다고 여겼으며, 남자들은 어린 그녀에게 거침없이 호감을 표시하곤 했다. 심지어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바로 옆에 서 있는데도. 그녀는 그럴 때마다 묘한 승리감에 차서 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거봐, 누가 나를 보고 애엄마라고 하겠어?
앞으로 나랑 같이 밖으로 나올 때는 나를 '이모'라고 불러.
어차피 내가 네 엄마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버스정류장에서, 수영장에서, 길 위에서. 그런 식으로 그녀는 내가 옆에 있을 때조차 스쳐 지나가는 모든 남자들의 시선을 받는 것을 한껏 즐겼다.


 그녀는 동시에 문득문득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특히 그녀는 내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가장 분노했다. 그녀가 생각했을 때 내가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라던지. 아니면 나에게서 내 아버지의 모습이 보일 때라던지.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망친 남자를 쏙 빼닮은 딸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온전히 그녀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절망과 분노였을 것이다. 단지, 성숙하지 못했던 그녀는 그 분노를 상대적으로 무력한 나에게 쏟아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더 최악이었던 부분은,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나를 완전히 증오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8년 간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관계는 분명 좋았을 때도 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했던 몇몇 행복했던 순간들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적어도 나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린 내 종아리가 벌겋게 퉁퉁 부을 때까지 매질을 했다가도, 그날 밤 한밤중에 자고 있는 내 종아리에 얼음찜질을 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화내면서 나를 때려놓고, 정작 내 몸에 자신이 내놓은 상처를 보며 펑펑 우는 그녀의 모습이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나를 사랑하는 건지, 증오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차라리 어느 한쪽의 모습만 보였다면 나로서도 그녀에 대한 입장을 정하기가 더욱 수월했을 텐데.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사정없이 휘둘렸다.


 그녀가 나를 떠난 후, 가끔 그녀의 그런 행동들을 곱씹어보곤 했다. 그녀가 나를 떠난 8살의 어느 날부터, 그것은 항상 내 머릿속에 자리하여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것이었다.


 내가 그녀의 마음을 비로소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그녀가 나를 떠났을 때의 나이쯤이 되어서였다.

나는 그때부터 조금씩 그 당시의 그녀가 나와 동갑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기 시작했고, 그때서야 비로소 내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을 그녀의 당시 시간과 비교해 볼 수 있었다.


 27살의 나는 당시로서는 꽤나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비록 취업에는 성공하진 못했지만 나름대로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내 명의로 된 차와 집도 있었으며, 그리 많은 월급을 주진 않지만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스타트업에서 꽤나 든든한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20대 초반에 호주에서 1년간 워킹홀리데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왔고, 인도에서 성지순례와 자원봉사를 했으며, 이탈리아어를 전공하여 현지에서 잠시 살아보기도 하였다.


'해 보고 싶은 것은 이제 웬만큼은 다 해봤다'


 이것이 당시 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들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문득 그녀에 대해 생각했다. 19살에 원하지 않는 남자와의 관계로 덜컥 임신하여 나를 낳고, 27살이 될 때까지의 그녀의 삶을.


 그녀가 늘 내게 하던 말대로, 그녀의 뱃속에 덜컥 나란 존재가 자리잡지 않았다면 그녀가 그 8년 동안 할 수 있었을 수많은 일들을 생각했다. 나와 같은 나이에 결혼과 출산이라는 인생의 숙제를 이뤄내고, 이혼이라는 짐까지 등에 짊어진 채 홀연히 집 밖을 나선 그녀의 삶의 상상할 수 없는 무게감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연민을 느꼈다. 내가 그녀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나는 잠시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므로. 그녀가 나를 버리고 갔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결국 그녀 자신의 삶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불행한 삶을 견디며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한 번 사는 인생'이라는 인식을 명확히 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녀는 그 순간을 느꼈고, 선택했고,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흘렀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녀의 모습, 커다란 짐을 짊어지고 울면서 밖으로 나서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지금의 나보다도 한참 어리다.


 어린 시절에는 어른들이 나보다 한없이 커 보이며, 삶의 모든 문제를 거침없이 결정하고 이끌어나갈 수 있을 만한 '해결사'로 보였다. 그러나 나이가 어느 정도 드니, 선생님들도, 의사들도, 엄마들도, 점점 나와 동년배이거나 나보다 어린 사람이 되어간다. 이렇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만약 언젠가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온전히 당신의 인생을 위한 것이었던 그 선택을 딸이 아닌 한 사람의 여자로서 이해하노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의 8년을 희생하여 내 곁에서 보낸 꽃다운 세월에 대해 진심으로 유감을 표하며.


 그럼에도, 낳아줘서 고맙다고.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 그럭저럭 행복하다고. 당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한 내가 이렇게 행복을 입에 담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당신을 닮아 이기적인 나로서는 그저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나는 이 세상에 내가 살아있어서 좋다고.



 





 생일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잘 챙기지는 않았지만 올해에도 어김없이 5월이 왔고, 점점 내 생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왜일까? 올해 들어 문득 나는 그녀의 생일이 궁금해졌다.


 어릴 때는 잘도 생각나던 어머니의 이름조차 이제는 간신히 애를 써야지만 떠오른다. 아, 그런 이름이었던가, 하고. 그러니 내가 그녀의 생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러나 그것을 아버지에게 물어볼 수 없다는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문득 그것이 알고 싶어 견딜 수 없어진 나는 퇴근길에 동사무소에 들러,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 보았다.(대체 이 사회에서 부모 자식 관계라는 것은 얼마나 지독히도 끈끈한가. 이혼을 한 지 거의 20년이 되어도, 자식의 가족관계증명서에 부모는 함께 기재된다.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한 모든 신상정보마저.)


 따끈하게 발급된 가족관계증명서를 들고 나는 나를 낳은 어머니인 그녀의 이름과 그녀의 생일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생일은 10월 23일. 나의 아버지와 한 달 차이의 날짜였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그동안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던 이런저런 기억이 떠올랐다.


 8살 때 학교 숙제로 부모님의 이름과 생일을 써가며, '우리 부모님은 나이 차이가 10넘게 나는구나. 그래도 생일은 한 달밖에 차이가 안 나'하고 생각했던 것.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가을에 태어났어'라고 생각했던 것. 그리고 5월 초의 내 생일을 듣고,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


"어머, 여름에 생긴 애잖아. 부모님이 서로 정말 많이 사랑하셨나 보다."







 요즘 들어 뉴스에 슬픈 사건 사고가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살 소식이다. 여성들의 자살 소식은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와 연결되어 본 적 없는 그녀들의 죽음에 왜 이토록 내 마음이 아프고 심란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쩌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한 뉴스는 유독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40대 여성과 그녀의 어머니인 70대 여성이 경기도의 한 오피스텔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다는 그 뉴스. 그 무엇도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은 모녀의 동반 자살은 내게는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엄마와 딸이 같이 죽는 이유가 뭘까?"

 "글쎄.. 너무 사랑해서가 아닐까? 혼자 보내기엔 너무 안타까워서."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왠지 그럴 것 같아. 우리 엄마도 날 너무 사랑하니까."


 친구의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아마도 나는 평생 죽을 때까지 느껴볼 수 없는 확신이겠지.



+


 올해 4월, 지난해 어머니와 함께 세상을 등진 예능인 故 박지선 씨를 추모하는 음원이 발표되었다. 노래 제목처럼 그곳에서는 부디 그녀의 삶이 보다 평안하고, 자유롭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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