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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May 19. 2016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나는 단지, 겨우 쓴다.

오늘 저녁, 지인을 만나러 강남역 근처에 갔었다.

바로 전날, 이 곳에서 한 여자가 한 남성에 의해 무참히 칼에 찔려 죽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전혀 모르던 사이였다.

3분.
남자가 화장실에 들어온 여자를 찌르고 도망가기까지.
고작 단 3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당신들은 그렇게 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원래 운명을 믿는 사람이었다. 비록 여기서 지칭하는 '운명'이 별도의 거창한 뜻을 담고 있다기보다, 그저 '될 놈은 뭘 해도 되고, 안 되는 놈은 뭘 해도 안 된다'는 정도의 가벼운 사상에 불과하긴 하지만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지인들이 결혼하여 새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서일까.

결혼과 임신, 출산이라는 과정을 거쳐 한 명의 인간이 무사히 태어나기까지가 얼마나 쉽지 않은 여정인지 느끼게 된다. 생각보다 유산하는 경우도 잦고, 열 달을 품어 힘들게 태어난 아이가 채 일주일을 숨 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는, 어찌 됐든 일련의 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사람들의 뒤에는 그 자체로 충분히 강한 운명의 힘이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시작부터 결코 쉽지만은 않은 생존 자체를 지켜낸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긴 삶과 그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주어진 운명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누구나 그 운명을 따라 살다가, 각자 명줄이 다 하는 시기에 맞춰 생명은 그 빛을 꺼트리고 소멸해 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각자의 삶을 마무리하는 다양한 방식들 - 자연사하거나, 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천재지변으로 희생되는 방식들-조차 당사자의 운명에 기재된 일종의 시나리오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최근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나는 이제 더 이상 '운명'을 믿지 않게 되었다. 만약에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누군가의 목숨이 그런 식으로 소멸되는 것은 너무도 잔인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을 가다가 차가운 바다 깊숙이 수장당하기 위해,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습기를 틀었다가 폐가 굳어가면서 죽어가기 위해, 화장실에 갔다가 모르는 남자의 칼에 찔리기 위해... 누군가가 이와 같은 처연하고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삶을 마감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생각은 도저히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운이 필요한데,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탄생한 생명의 존재 이유가 고작 저런 이유로 생을 마감하기 위함이었을 리 없지 않은가.


당연히 그들에게는 다른 삶이 있었을 것이고, 살아가는 동안 수행해야 할 다른 과업이 있었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볼수록, 그들은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당신들은 그렇게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절대 아니었다.



왜 하필 그들이어야만 했는가.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당시 뉴스 화면에 속보로 보여주던 것은 대체 몇 명이 탑승할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배의 모습이었다. 그 배가 실시간으로 뒤집어져, 뱃머리만 남긴 채로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며. 배 안에 갇힌 채 생매장되어버린 아무 죄 없는 어린 생명들을 보며, 대체 그들이 전생에 무슨 업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끔찍하게 죽어가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인과응보도 아닐 것이었다. 고작 17년 남짓한 짧은 생에서 그들이 무슨 큰 죄를 저질렀겠는가.


그들의 잘못은 오직 하나. 하필 그 시간에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우연의 일치로 인하여, 재수없게도. 우연히 그 날 그 배에 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속절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사전에 그들이 예측할 수도, 대비할 수도 없는 요인이 그 날 배에 타고 있던 수백 명의 삶을 통째로 앗아가 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TV로 생중계된 그들의 참혹한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 자체에서 오는 충격도 있었지만, 가장 큰 충격은 희생자들과 나 사이의 차이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나는 언제라도 그 배에 타 있는 사람일 수 있었다. 단지 운이 좋아서 사고가 난 그 날에 그 배에 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일 뿐이었다. 이후 누군가가 세월호 사건을 두고 '교통사고'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아직 살아 있는 이유가 '아직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더욱 무서운 점은, 그 '교통사고'는 내가 교통법규를 지키고 아무리 조심해도 도저히 나의 힘으로는 예측할 수도, 예방할 수도 없는 사고라는 점이었다.




우리는 예방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강한 두려움을 느낀다.



<악마를 보았다>라는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여자들은 이 영화에 대해 특히 강한 두려움을 보였다. 그 이유는 영화 속에서 살인마에게 희생당하는 여성들이 공포나 살인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클리셰'에 기인한 별도의 범죄 유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무자비한 살인범에 의해 희생되는 여인들은 밤길을 혼자 맨몸으로 걸어 다니지도 않았고, 낯선 이에게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없이 조심스러웠고 신중했다. 그렇지만 살인마는 그녀들이 조심스레 걸어 잠근 차문을 부수고, 벌건 대낮에 범죄를 저지른다. 여자들이 스스로 조심하기 위하여 겹겹이 쳐 둔 온갖 경계의 벽을 살인마는 한 순간에 거침없이 훅, 뚫고 들어와 사정없이 난도질해버린다. 희생되는 여자들의 조심성을 비웃으면서. 그의 심상찮음을 눈치채서, 신중하게 대처해서, 하다 못해 운이 좋아서라도 살아남은 피해자는 없었다. 일단 어떻게든 상대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살인마의 레이더에 걸려버린 피해 여성들에겐 애초에 선택지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 일어난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의 피해자도 그러했다. 이 사건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살인사건의 전형적인 클리셰로 느껴지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범행 장소는 유동인구가 많은 대로변에 위치해 있었고, 깨끗하고 하얀 조명이 설치된 밝고 개방적인 장소였으며, 화장실에는 외부인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도록 도어록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안전 보장에 대한 별다른 의심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안심하고 화장실에 들어섰던 희생자는 결국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잘못은 없었다. 오직 '여자를 죽여야겠다'며, 그녀가 출연하기 전 1시간 반을 화장실 근처에서 서성였던 범인의 강한 의지가 있었을 뿐이다. 그저 그 남자가 그런 마음을 먹었던 순간, 그녀가 그곳에 나타난 것이 잘못이었던 것이다. 마치 예측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교통사고'처럼. 그것은 순식간에 나타났고 그녀의 목숨을 한 순간에 앗아가 버렸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보통 사람들은 범죄 기사를 볼 때, 혹은 영화를 볼 때, 희생자가 취한 행동과 자신의 평소 행동이 '다른' 점부터 찾아내려고 한다. 범죄의 대상자가 되는 데에는 사실 딱히 다른 이유가 있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희생자의 행동에서 자신과 다른 점을 찾아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것이다. '아, 저 사람은 역시 나와 달라. 저 사람은 그런 일을 당할 만했어. 그렇지만 나는 저렇게 행동하지 않으니까 괜찮을 거야!'라고. 문제의 원인을 명백히 범인에게 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당장의 마음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희생자와 자신의 다른 점을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강남역 화장실 사건은 그렇지 않았다. 대중들이 패닉에 빠진 이유는, '나였어도 그랬을 거야'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러워하고, 경악하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희생자와 자신이 명백히 다른 점을 억지로라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에. '그럴 만했다'고 애써 말하며, 피해자의 탓을 할 '구실'이 딱히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시간과 상황을 돌려 우연의 그 상황 속에 자기 스스로를 가져다 놓는다 해도, 희생자와 똑같이 행동했을 자신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왜 나는 살아있고, 피해자는 죽었는지. 왜 피해자가 그때 죽어야만 했고, 왜 내가 계속 살아가야 하는 건지 현재 상황에선 그 당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의 삶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에 뭔가 떳떳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왜 살아있는 것일까.



어제, 그리고 오늘. 나는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깊은 슬픔을 느낀다.

페이스북으로, 포털사이트로, 지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에 귀 기울이는 나 자신이 한없이 비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는 부끄러움과, 나 자신이 내 삶의 위해 요인을 통제할 수 없다는 한없는 무력함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아직', 혹은 '문제없이' 살아있는 이유가 바로 어제 그 사건이 일어났던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오늘,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갈 이유가 무엇인지 어떻게 설명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과 관련된 자극적인 언론 보도를 보고, 떠돌아다니는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고 마음아 파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저 대상이 내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한 부끄러운 안도가 앞선다. 죽은 자와 상처받은 자들은 이미 이런 글과 사진들을 볼 수 없는데.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 자극적인 영상과 움짤로, 혹은 기사로 여러 곳에 복사되어 찌라시처럼 뿌려지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공포에 물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나의 삶이란. 문득 자각하는 순간, 그 자체가 견딜 수 없으리만치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지금 분노하는 이유가 순전히 저 피해자의 억울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 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 또한 언제든지, 어디에서든 저런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현실적 상황에 대한 막연한 공포도 섞여 있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어쩌면 내일부터 이 모든 걸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 불의의 사고를 당할지, 혹은 범죄의 피해자가 될지 모르는 일이기에.
그러기에 어쩌면 나에게는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내일도 우연의 힘을 빌어 무사히 살아남아 이 글을 다시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랄 뿐. 이 땅에서 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바라야 하는 것이 스스로의 노력이 아닌, 기적 같은 우연이라는 것은 굉장히 씁쓸한 일이지만 서도.




생명의 아름다움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사람이 입을 벌려 말할 필요는 없을 터이지만,
지난해 4월 꽃보라 날리고 천지간에 생명의 함성이 퍼질 적에
갑자기 바다에 빠진 큰 배와 거기서 죽은 생명들을
기어코 기억하고 또 말하는 것은
내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겨우 쓴다.

- 김훈, 「세월호」 중에서

Cover Image : ⓒAndrew Buti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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