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에 놓인 불판 위에 끝에서부터 타 들어가는 소고기 특수부위처럼 내 속도 시꺼멓게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보면서도 내가 이런 사치를 부리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과연 이 소고기를 이대로 이렇게 남겨도 되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아이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을 텐데.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범위를 확장시키지 않더라도 당장 눈 앞에서 타 들어가는 이 소고기를 입에 넣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도 많을 텐데.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사이에도 고기는 점점 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의 젓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최근의 나는 기묘할 정도로 입맛이 돌지 않았다. 단순히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는 여름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최근 몇 주 사이, 직장에서 급격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었다. 하나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다음이 있었고, 여기서 끝인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변화구가 던져졌다. 사전에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는 묵직하게 날아오는 변화구들을 그저 맨몸으로 퍽퍽 맞아야 했다. 그중 몇 개는 명치께를, 몇 개는 머리를 가격했다. 도무지 멍하고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벗어나 보려고 나름 발버둥을 쳐봤지만 그때서야 비로소 나의 손과 발이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꽁꽁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 이렇게 일어날 수도 없이 묶여버린 걸까? 더욱 최악인 것은, 손발이 묶여버린 나는 곧 다가올 이런저런 상황의 변화로 인한 충격들을 이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무도 무력했다.
하루는 답답한 마음에 전화로 사주까지 봤는데, 수화기 너머의 역술인은 나의 사주를 보자마자 혀를 끌끌 차며 이렇게 말해왔다.
'거 참... 당신 주위의 인간의 형상을 한 모든 것이 당신을 괴롭히고 있네요.'
듣자마자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최근의 나의 상황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하다. 나의 괴로움의 근원은 결국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직장인의 삶은 나로 하여금 '인간'과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두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원인을 알 수 없는 식욕 부진이 찾아온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날도 결국 나는 대부분의 고기를 남겨버렸다. 그전에 먹었던 몇 점도 겨우 우물우물 씹고 삼켰을 뿐. 근데 그나마도 잘 넘어가지 않고 식도 중간에서 딱 멈춰버렸다. 소고기를 또 씹어서 넣으면, 식도 아래로 밀어내려 넣어지지 않고 그 위로 쌓이고 쌓여 결국 내 기도를 막을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맹세코, 그날처럼 내 인생에서 소고기를 그렇게 아무 감흥 없이 씹어 넘겼던 날은 없었을 것이다.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소고기 찬스를, 그렇게 눈앞에서 날려버리고 만 것이다.
이상한 건, 그렇게 소고기를 잔뜩 남기고 집에 들어온 다음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니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평소 입이 짧은 편이라, 아까 소고기 몇 점을 먹고 분명히 배가 불러서('속이 더부룩해서'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지만) 들어왔는데, 이 허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도 모르게 찬장을 열어 라면을 하나 꺼냈다. '지금 내가 이걸 끓여서 다 먹을 수 있을까?'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그 고민은 1초도 되지 않아 진정성을 잃고 말았다. 고민하는 찰나의 사이에 이미 내 손은 봉지를 뜯은 뒤였으므로.
그냥 끓이기에는 어쩐지 좀 아쉬워서, 평생 감자탕집을 운영하시다 최근 가게를 정리한 고모가 냉동해뒀다 먹으라고 주셨던 뼈와 육수를 꺼냈다. 그대로 전골냄비에 같이 넣어 보골보골 끓이다, 라면과 라면수프를 넣고 마저 끓였다.
그렇게 뚝딱 한 냄비 끓여 상을 차린 뒤, 쪼그리고 앉아 호로록 면발을 들이켰다. 이상했다. 분명히 아까 소고기를 먹을 때만 해도 식도가 꽉 막힌 듯 목이 턱턱 막혀서 도무지 들어가질 않더니만, 얼큰한 국물이 배어든 면발은 들이키자마자 미끄러지듯 식도를 열더니 그 아래로 탄력 있게 쏙쏙 빨려 들어갔다.
호로록. 습...
호로록. 습. 하...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집 안에서 그렇게 호로록호로록 원초적인 소리를 내며 라면을 먹고 있자니, 문득 예전에 종종 친척 집에 놀러 갔을 때 보았던 사촌 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매일 저녁마다 남편과 아이들이 먹을 저녁식사를 차리고, 식구들을 먹이고, 설거지를 했다. 그러나 정작 언니는 밥을 먹지 않았다. 식구들이 저녁식사를 먹고, TV를 보고, 저녁 일과를 보내는 동안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러다 밤 10시가 넘어 아이들이 하나씩 전부 각자 방에 들어가고 남편도 잠을 자기 시작하면, 그녀는 혼자 식탁 한 구석에서 라면을 끓여먹곤 했다.
그러니까 지금,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앉아 라면을 먹는 내 모습이 어쩐지 그때의 언니와 좀 닮아 있었다. 언니가 20대 중반에 결혼을 하고 그다지 오래되지 않아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니, 아마 그때 식탁에 앉아 혼자 라면을 먹던 언니는 지금쯤의 나와 비슷한 나이였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언니가 왜 우리에게는 건강에 좋고 맛있는 반찬을 잔뜩 해서 밥상을 한가득 차려주면서 정작 본인은 우리와 함께 밥을 먹지 않는지. 왜 남들 다 잘 때 혼자 몰래 허겁지겁 몸에 안 좋은 인스턴트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인지. 하루 이틀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거의 매일을 말이다.
그때 나는 단순히 언니가 그냥 음식을 만드는 동안 폴폴 맡았던 음식 냄새에 질린 줄로만 알았었다. 나도 성인이 되어 요리를 해보니, 막상 이것저것 냄새를 맡고 간을 보며 음식을 만들다 보면 정작 차려놨을 때 먹고 싶은 마음이 덜한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때의 언니와 비슷한 나이가 된 지금은 좀 알 것 같다.
언니 또한 번아웃이 왔던 게 아닐까. 당시 전업주부였던 언니는 부지런히 하루 세 끼 밥을 차렸다. 근처에서 일하던 형부는 점심도 집에 와서 먹고 갔으므로, 언니는 밥을 차리고, 차리고, 또 차려야 했다. 언니에게는 그 식탁이 너무 버거웠던 것은 아닐까. 언니는 밥상이 지겹지 않았을까. 식구들이 둘러앉아 자신이 차려놓은 밥을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이상 언니의 삶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주지 못한다고 느꼈을 때, 지금의 나처럼 '대체 내 인생은 뭔가'하는 허탈함을 느꼈을 때. 바로 그때가 언니의 식도가 막힌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식도가 열리는 시간은 오직 밤, 그것도 언니를 옥죄고 힘들게 하는 '인간의 형상'들이 모두 사라진 식탁에서 뿐이었다. 조용히 혼자 남겨져 그들의 존재를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된 그때서야 언니는 식탁에 앉아 혼자 라면을 먹었다.
평소에 영양을 세심히 따지고 메뉴를 고려해 식구들에게 정성스레 차려주는 음식과는 달리, 오직 제 뜻대로, 자신의 기호에 맞춰서 간단하게 한 끼가 되어주는 인스턴트의 간편함에서, 맵고 칼칼한 국물이 막힌 식도를 시원하게 풀어서 열어주는 그 느낌에서. 언니는 분명 어떤 위로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난 그런 것도 모르고, 한쪽 무릎을 세우고 구부정하게 몸을 기울인 채 세상 멍한 표정으로 혼자 면발을 들이켜던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청승맞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늘 핀잔을 주었다. '왜 맨날 밥은 안 먹고 라면만 먹냐, 몸에도 안 좋은데'하고. 그럼 언니는 고개를 들어 나를 향해 그냥 말없이 씩 한번 웃어 보이고는 다시 묵묵히 젓가락질을 계속했다.
나는 이상하게 그런 언니의 모습이 계속해서 눈에 밟혔다. 그 식탁이, 언니의 앉은 자세가, 언니 앞에 놓인 라면이... 어쩐지 자꾸만 눈에 밟히는 그 이미지가 아무래도 내 안에서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평생 언니를 떠올릴 때마다 그 모습을 가장 먼저 기억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의 나는 몸에 좋은 소고기를 싹 다 태우고, 남겼다. 그리고 집에 와서 인스턴트 라면을 한 냄비 푸지게 끓여먹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짓 아닌가? 그렇지만, 그 순간의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소고기가 아닌 라면이었다.
확실히, 라면은 건강에는 좋지 않고, 영양 구성도 변변치 않지만 그럼에도 살다 보면 라면밖에 먹히지 않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라면이라도 먹어야 한다.어찌 됐든 답답함에 막힌 식도를 풀어주고, 헛헛한 배도 알싸하게 채워주는 라면은, 하루를 살아갈 든든함을 주는 영혼의 비상식량이자 소울 푸드니까.
그러니 어떤 것도 먹히지 않는 상황에 무엇이든 먹히는 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보약이라고 생각하고 먹자. 그렇게 하루하루 먹히는 대로 먹다 보면 언젠가는 다른 음식도 조금씩 먹히는 날도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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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내가 죽기 전에 먹을 마지막 음식을 고르지 못했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딱 한 가지의 음식만 마지막으로 먹을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 김치만두와 라면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