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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May 31. 2021

쓰기가 치유의 수단이어선 안 되는 걸까

이슬아 작가의 브런치북 전자책 출판 프로젝트 심사평을 보고


 2021년 5월 31일.

 오늘은 브런치북 전자책 출판 프로젝트 공모전의 수상작이 발표되는 날이었다. 

 별 기대 없이, 기존에 만들어 둔 브런치북으로 습관적으로 응모했던 나는 수상을 전혀 기대하진 않았음에도, 왠지 모르게 이 날이 기다려졌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고, 글을 써온 지 어느덧 5년이 되다 보니 브런치에서 하는 축제가 왠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비록 그 축제의 주인이 내가 아니더라도, '과연 이번에는 어떤 브런치북들이 수상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이 날을 기다려온 것이다. 


 그리고 브런치팀 브런치에 대망의 수상작 발표글이 올라왔다. 



 발표글에는 한 편 한 편 특색이 넘치는 브런치북 수상작들과 함께 심사를 맡았던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이 달려있었다. 수상작들이 참 대단하다는 마음 반, 부러운 마음 반으로 읽어 내려가다 시선이 닿은 최하단에는 이 공모전에 응모한 모든 참가자들을 위한 각 심사위원들의 심사 총평이 기재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이번 공모전에 도전했던 나의 글 또한 이 심사 총평의 대상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다, 이슬아 작가의 심사 총평에서 나도 모르게 멈칫하게 되었다. 



 그녀의 심사평을 보자마자, 유독 눈에 들어온 부분은 이 두 부분이었다. 



"흥미로운 작품이 많지 않아 아쉬웠다."
"자기 치유 이상의 작품"



 뭐랄까, 명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저격당했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 물론 이슬아 작가가 이번 공모전에 응모한 수많은 글 중 내 글을 콕 저격하여 한 말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나도 그 정도의 자의식 과잉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심사평에 뜨끔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일전에 브런치에서 글맛 작가님이 쓰신 아래 글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었다.



 이 글에서 글맛 작가님은 조금 신랄한 어조를 빌어 이렇게 말한다. 



 "일상 에세이 안 팔린다.
브런치북 대상 수상하고 싶으면 그런 거 말고
본인이 좋아하는 거, 잘 아는 거, 잘하는 것에 대해 써라."


 

 나 또한 이미 몇 번의 브런치북 프로젝트 응모 및 탈락 경험이 있었기에, 글맛 작가님의 인사이트에 동의하면서도 마음 한켠은 서운했다.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해도 저 기준에 의하면 내 글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안 팔리는, 지극히 마이너한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오늘 올라온 이슬아 작가의 심사 총평이 엄청난 임팩트로 꽝 하고 아픈 자리를 내려친 것이다. 내가 브런치북에 담았던 12편의 글들이, 한번 더 확인 사살당하는 기분이었달까.


 나의 글쓰기는 지극히 나를 중심으로 한다. 나는 내가 대체 왜 이러는지 궁금하다. 어딘가에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지극히 고립된 공간에서 세상을 향해 글을 쓴다. 한편 한편의 글을 쓸 때마다 왠지 모를 개운함을 느끼며, 그렇게 차곡차곡 나의 세계를 세상에 조금씩 뱉어내는 게 좋다. 자기 치유가 내 글쓰기의 명확한 목적이자 시발점은 아닐지 몰라도, 글을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 위로받고 치유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슬아 작가의 심사평에 의하면 내 글은 이미 많이 본 듯한 식상한 구성에, 자기 치유 그 이상을 제시하지 못했고, 타자가 아닌 스스로에 매몰된 작품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쓰기가 치유의 수단이어서는 안 되는 걸까? 게다가 은둔형 외톨이인 나로서는 인생에서 소재로 삼을 게 나밖에 없는데. 꼭 '나'를 벗어난 타인이나, 어떤 것을 소재로 삼아야만 읽는 이에게 의미 있는 글이 되는 것일까? 내가 충분히 유명하고,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지극히 평범한 나를 소재로 쓴 글로는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걸까?


 분명히 응모했다가 떨어져 놓고 이런 소리 하는 게 어찌 보면 좀 비겁한 변명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글을 쓰는 세계의 생리가 그런 것이라면, 나는 내 글이 이렇게 돈이 되지 않는 그냥 '글'로만 남아도 나름대로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꼭 돈이 되어야만, 누군가 상을 주고 출간을 해주고 인정을 해줘야만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시간들이 의미가 있는 건 아닐 터이니.


 그래, 나는 인생은 단조롭고, 성격은 소심하고 찌질한 인간이다. 그래서 이번 브런치북 공모전에서 떨어졌다. 돈 안 되는 자기 치유성 글만 주구장창 써서. 남들이 읽고 싶어 하는 글, 궁금해하는 걸 쓰지 않고 철저하게 내가 재밌는 글 쓰고 내가 읽고 싶은 글만 쓰기 때문에. 그러니 어쩌면 나는 평생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는 못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렇게 글을 쓸 때조차 이기적인 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내 글을 꾸준히 봐주고 있는데,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지금 이 글조차 이슬아 작가의 심사 총평에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쓰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어쨌든 이렇게라도 소재와 영감을 얻어 내 브런치에 오늘도 글을 하나 더 쌓을 수 있다는 것에 조금 기뻐하는 나 자신이 있다. 그녀의 심사 총평을 보고 꽁기했던 마음이 한동안은 깨끗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여기에 터놓으니까 조금 후련하긴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남들이 어떻게 보든, 인정해주든, 인정해주지 않든 오늘도 한 줄 한 줄 꿋꿋이 써나가는 것뿐이겠지. 비록 누군가에게는 내 글이 자기 치유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지 못하는 흔하디 흔한 글일지라도, 한 줄이라도 쓰는 이상 이것에 최소한의 의미는 있을 거라고 믿으며. 




+

 그래도 심사 총평으로 얻은 상처는 다행히 심사 총평으로 치유되었다. 배순탁 작가의 따스한 심사평은 막 상처 입어 피가 나는 마음에 액상밴드와 같은 긴급 조치를 행해주셨다. 


 수상을 가르는 것은 심사위원의 취향에 따른 문제이며, 수상하지 못했더라도 누군가는 여러분의 글을 선택했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는 것. 그 말에 다시 한번 성실하게 자기 치유적인 글을 써나갈 용기와 힘을 얻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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