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리틀 선샤인> : 동네 병원에서 프랭크 삼촌을 마주치다
잠들 수 없는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
침대에 누우면 누군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은 답답함에 숨을 쉴 수 없이 속이 갑갑했다. 음악을 틀어놓아도, 책을, 영화를 틀어놓아도. 의식은 잠이 드는 듯 멍해졌다가도 이내 선명하게 다시 돌아오곤 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내가 잠들었던 시간은 만 하루도 되지 않았다. 내 얼굴은 점점 유령처럼 창백하고 퀭해져 갔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문득,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면제를 한 번 먹어볼까.’
사실, 처음에는 신경정신과에 한 번 가 보려 했었다. 그러나 신경정신과는 예약이 가득 차 있었고, 당장의 잠이 급한 나는 동네의 내과로 향했다. 기본적인 수면제는 동네 병원에서도 처방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의사의 앞에 앉은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 가끔 들르던 병원이었던지라, 의사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 ‘수면제를 처방받으러 왔다’고, 눈을 내리깔며 더듬더듬 힘겹게, 조금은 수치스럽게 그 말을 내뱉었을 때. 그는 한동안 대답 없이 내 까칠해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잠깐의 침묵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원하기만 하면 세상을 다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이 생겼으면서, 뭐가 그렇게 슬프고 안타까워서 잠을 못 자나요?”
“....”
“내가 비록 아저씨지만.. 이만큼 살다 보니, 지나고 보면 행복했던 때보다는 슬프고 가슴 아팠던 일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더라고요.”
그 순간, 무릎 위로 내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친, 뜻밖의 위로였다.
그 날, 그 의사는 나의 프랭크 삼촌이었다.
깊이 좌절한 드웨인에게,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루저’ 삼촌 프랭크.
he gets down to the end of his life...
and he looks back and decides
마르셀 프루스트는 말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that all those years he suffered-
Those were the best years of his life,
힘겨웠던 시절들이 삶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했단다.
'cause they made him who he was.
그게 자신을 만들었으니까.
All the years he was happy?
You know, total waste. Didn't learn a thing.
행복했던 시절에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대.
- 프랭크, <미스 리틀 선샤인 (2006)> 중에서
불과 30년 남짓 되는 짧은 인생이지만, 지금 나도 그렇다.
돌이켜보면 그와의 행복했던 시간으로부터 남은 것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 행복 속에 안주했고, 스스로를 돌보는데 소홀했으며, 오로지 그 순간을 즐기는 데에만 집중했을 뿐이다. 오히려 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나 자신’을 위한 뭔가를 하기 위해 다시 움직이도록 했던 것은 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믿었던 그가 나를 떠난 후 느꼈던 엄청난 고통- prime suffering time -이었다. 나는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고, 조금씩 더 강해졌다.
사랑이 끝난 후, 사랑으로부터 남은 것은 없었지만 그것이 끝난 뒤의 고통과,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나의 자취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남고 있다. 결과가 남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마냥 행복하던 과거의 나보다는, 지금의 내 모습이 조금은 더 좋다는 것. 어찌 보면 '행복'은 '현재'와, '아픔’은 ‘성장’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나도 나의 prime suffering time을 돌이켜보며, 좌절한 젊은 영혼의 마음에 붕대를 감아줄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내 인생의 한 순간,
<미스 리틀 선샤인>의 프랭크 삼촌이 되어 갑자기 뜻밖의 위로를 건네 왔던 그 의사처럼.
단, 완벽하지 않은, 조금은 부족한 어른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