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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Jul 31. 2019

히피펌 해서 다행이야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해피 히피펌


“아무래도 히피펌을 해야겠어!”



처음 마음 먹었던 건 작년 봄부터였던 것 같다. <레인맨>의 발레리아 골리노를 본 직후의 일시적인 뽐뿌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 마음이 오래갔다.


<레인맨>의 수잔나 역, 발레리아 골리노.



그러던 어느 여름, '어, 나 정말 히피펌 해야겠는데?' 생각하자마자 바로 아무 미용실에 찾아가서 히피펌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내 소중한 머리카락은 다 탔고, 컬은 생각만큼 세지 않았으며, 일주일 만에 금방 풀려 늘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 머리색은 한 톤 밝아져서 금발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결국 그 상태로 머리가 회복되기를 기다린 뒤, 올해 내 생일에 2차 히피펌을 하기로 마음먹고 치밀하게 관리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실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한 ‘히피펌 성지’라는 1인 미용실을 찾아가기로 일찌감치 마음을 먹었다. 미용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공지사항을 꼼꼼히 읽고, 펌이 잘 나오도록 뿌리 염색도 관두고 어떤 펌 시술도 하지 않았다. 또한, 머리가 길고 풍성할수록 예쁜 히피펌의 특성상 머리를 자르지 않고 최대한 쭉 길러볼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날벼락같은 일이 일어났다. 새해를 맞아 상한 끝부분만 다듬으러 갔던 미용실에서, 헤어 디자이너가 과욕을 부려 내 머리를 레이어드 컷으로 크게 층지게 잘라놓은 것이었다. 가슴까지 곧게 길렀던 머리는 이제 앞의 반은 똑 단발, 반은 긴 머리인 기괴한 형태가 되어있었다.


 당황하고 속상한 마음에 미용실에 항의를 했고, 보상은 받았지만 이미 볼품없이 잘려버린 머리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5월까지 남은 시간은 4개월 남짓.


 결국 피나는 노력을 시작했다. 모발과 손톱의 성장을 촉진한다는 비오틴을 포함한 영양제를 먹기도 하고, 모발 생장에 도움을 준다는 검은콩을 매일 한주먹씩 먹었다. 패스트 샴푸를 쓰고, 두피 마사지와 클리닉을 2주에 한 번씩 받으며 어느 정도 머리를 기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대망의 날, 한 달 전에 어렵게 예약했던 히피펌 성지에 발을 디뎠다. 무려 그곳에 가기 위해 평일 연차까지 내고!


 온통 새빨간 미용실은 재미있는 오브제와 도구들로 가득했다. 그 공간의 주인인 미용사 아저씨마저 ‘힙스터’스러운 독특한 느낌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모태 히피펌 메리다 님이 보고계셔...

 보통 머리를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디자이너가, 한쪽은 수습생이 말아 올리는 다른 미용실과는 달리, 여기는 1인 미용실이므로 아저씨 혼자서 잔머리 한 올까지 장인정신으로 직접 한 땀 한 땀 말아주셨다.


 사실 중화 전에 지나치게 용수철처럼 말려버린 머리를 거울로 확인하고 한바탕 깔깔 웃어댄지라, 머리가 당최 어떻게 나올지 나 조차도 확신이 안 섰다. 아저씨도 컬이 잘 나올지 안 나올지는 개개인의 머리 상태와 모발 질에 따라 다르므로 일단 시술해 놓고 결과물을 봐야 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확신과 해방감이 들었다. 완성된 머리와 내 비주얼을 보기 전부터 나는 벌써 이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중화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는데, 쫄딱 젖어 있을 때는 차분하던 머리가 바람에 말려지며 점점 풍선처럼 부풀어갔다. 완성된 머리는... 뭐랄까, 거대했다. 사자 갈기같이 한껏 부풀어 오른 머리가 내 어깨와 등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부피감을 자랑하며 내 얼굴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발레리아 골리노는 될 수 없었지만, 적어도 펌 그 자체만으로 뭔가를 해낸 것 같은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 손님을 받기 위해 나를 배웅하며, 히피펌의 창조주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충 살아, 히피펌도 했는데.”



 아무래도 아저씨는 내게 히피펌을 하사하던 2시간 반 동안, 내 안의 ‘노잼’인 모범생을 이미 간파하셨는지도 모른다. 머리만이라도 일탈을 추구하고 싶었던 내 얄팍한 심리를 꿰뚫은 것 같기도 하고. 크게 부풀어서 다소 어색한 머리와, 목덜미에 닿는 복실 한 느낌과, 조금의 쑥스러움과,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의 놀라운 눈길을 받으며 집으로 가는 길이 다소 어색했던 느낌을 기억한다.





그리고 3개월 뒤...


 <퇴사하겠습니다>의 저자 이나가키 에미코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아프로 헤어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보는 사람마다 '무장해제'를 시키는 비장의 무기로 작용한다. 펑키한 아프로 헤어를 한 그녀는 도저히 지루하고 평범한 신문사의 직원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동료들 또한 아프로 펌을 하고 나타난 그녀에게 환호를 보냈다. "와, 외국인이랑 일하는 것 같아요!"

<퇴사하겠습니다> 저자 이나가키 에미코


 반복되는 경직된 일상에 질리고 지친 이들에게, 아프로 펌을 한 임원인 이나가키 에미코의 일탈은 파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네모네모 조각으로 가득한 세상에, 유쾌하고 유연한 둥그런 원형 같은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파격은 부딪히는 사람의 마음에 재미를 주고, 반짝하는 호기심을 갖게 한다. 정방형 사무실에 활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나 또한 그녀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상당히 보수적인 분위기고, 유관부서가 아닌 분들과는 좀처럼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다. 입사 3년 차이지만, 아직 한 번도 말을 섞어보지 않은 분도 있었다. 그러나, 히피펌을 하고 나서는 부쩍 친근하게 말을 붙여오는 분들이 많아졌다.



"어머, 어쩜 이런 머리를 할 생각을 했어?"



 그러면서 내 머리를 만져봐도 되냐고 묻거나, 혹은 말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튀어나와서 무심결에 내 머리를 만져버리거나 하는 그분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재미있는 무언가를 발견한 아이처럼 눈이 반짝거린다.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으신 분도, 혹은 나이가 한참 어린 길바닥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아이들조차, 사자 갈기처럼 부풀어올라 바람에 나풀거리는 내 히피펌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반짝, 하는 그 빛을 어느새 나는 마음을 열고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히피펌을 한다고 해서 꼭 힙스터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런 독특한 모습으로 그저 누군가의 일상 속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지루한 하루하루가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질 수 있다면. 내가 누군가의 네모 세상 속 동그라미가 될 수 있다면. 똑같은 하루하루에 기억에 남을 만한 특별한 즐거운 발견을 선사할 수 있다면 이대로도 좋은 거 아닐까.



살면서 못해볼 건 없으니깐.. 한 번쯤은 지지고 볶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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