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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Sep 24. 2019

1인분의 삶

덜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일상을 유지하는 사랑스러움이란.



“‘당신에 대해서 더 이상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요.”


한창 뜨거웠던 8월의 어느 날. 그것은 한 남자에게 전화로 이별을 통보하며 건넨 말이었다.

서로 늦은 나이에 소개팅으로 만나, 모처럼 순조롭게 시작한 연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만난 지 총 2달, 사귄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는 시점에 이미 나는 그에게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내게 굳이 이유를 따져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가 나에게 이 이별의 사유를 물어온다면, 기꺼이 대답해 줄 수 있는 답변은 내 안에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저는 1인분의 삶을 잘 살아가는 사람이 좋아요.”라고.






 “뭐하러 힘들게 독립해서 살아? 독립하면 내가 집안일 다 해야 하잖아, 귀찮게.”


 그와의 길지 않은 만남의 과정에서, 서로 나누었던 대화 속에서. 몇 번이고 뒤통수를 잡아챌 듯한 서늘함이 밀려오던 순간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그가 저 말을 처음 꺼낸 순간. 그와 만나는 도중 몇 번은 들었던 것 같은데, 몇 번을 들어도 어색하고 적응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였던 그는 아직 독립하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직장도 먼데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답답하지 않냐고, 독립하고 싶지는 않으냐고 가볍게 던졌던 질문에 그가 한숨을 푹 쉬며 저런 답을 내놓았을 때.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의문이 솟구쳤다. ‘집안일이 힘들다’는 것이 독립을 망설일만한 사유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이혼 후 8살 무렵부터 친척 집에 얹혀살며 나름 독립적(?)으로 살아왔고, 20살이 되자마자 그 집을 나오며 서울로 혼자 독립하여 10년이 넘는 세월을 혼자 살아왔던 나로서는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발언이기도 했다.


 그는 집안일이 싫다고 했고, 그나마 밥은 회사에서 주는 대로 먹고 다니지만 방 청소는 부모님이 해주신다 했다. (그가 30대 중반이었으니, 그의 부모님은 최소 60대 정도는 되셨을 텐데 다 큰 아들의 방청소를 해주다니..) 가끔 쉬는 날이라 집에 있을 때엔 밤새 게임을 하고,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야 뒤늦게 일어나곤 했다. 뭔가 해 먹기 귀찮다고, 그냥 굶겠다는 그에게 밥 차려주고 과일을 깎아 주는 어머니가 계셨다. (물론, 다 먹고 난 후 뒤처리와 설거지도 어머니의 몫이다. 짐작컨대 그는 설거지가 귀찮아 스스로 요리를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는 매달 일정한 수준의 생활비를 부모님께 드림으로서 함께 사는 장성한 아들로서의 의무는 다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내 눈에는 그의 삶이 너무도 미숙해 보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부모님의 품을 떠나 혼자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말도 건네보았지만 그는 별 생각이 없는 거 같았다.


“아마도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면, 기계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웬만하면 기계로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로봇 청소기나 식기세척기 같은 거. 난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싶은데.”


 잊을 만하면 이런 말을 하는 그 덕분에, 새로 사귄 연인에 대해 풍선처럼 부풀었던 마음은 절인 오이 피클처럼 짜게 쪼그라들고 말았다. 나에게 있어 그는 더 이상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대화가 반복되는 속에서 보이는 그의 일관된 모습에, 그는 내게는 ‘남자’이기보다는 ‘아들’로, ‘사람’이라기보다는 ‘미성년’으로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한 달만에 빠르게 헤어짐을 결단하기는 결코 쉽지만은 않아서, ‘이 나이에 내가 뭐, 꼭 결혼을 할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사귀게 된 나 좋다는 남자인데, 그냥 꾹 참고 만나볼까? 연애만 하면 되잖아’라며 나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해도 안됐다. 인간으로서의 존중심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본인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영위할 능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기에. 설령 부모님이 안 계신다 해도 본인이 스스로 그 일들을 할 의지도 없고, 그 의지 부족으로 인해 능력이 퇴화된 남자에게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을 리 없었다. 두근거림은커녕, 최소한의 경외심도 들 수 없는 남자였다.


  그에게 이별을 통보하며, 나는 ‘1인분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제 몫을 한다’는 표현이 있다. 어릴 땐 누구나 보살핌이나 돌봄을 받는 게 당연하다. 누군가가 항상 곁에 있어줘야 하고, 정상적인 경우 누구도 미처 다 크지 못한 아이에게 ‘제 몫’을 하라고 다그치진 않는다. 그저 필요한 도움을 주면서, 도움을 받은 아이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보통은 청소년기를 거치며 한 차례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는 부모의 보살핌 아래에서도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고, 특정한 사회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부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이다. 학생들은 공부를 하며, 스스로 자신의 ‘몫’을 해 나간다. 이때까지도 이건 온전한 1인분의 삶은 아니다.


  ‘1인분의 삶’이란, 누구의 보살핌이나 돌봄 없이도 온전히 스스로의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성인의 삶이다. 이것은 경제적인 독립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인 독립에 더 가까운 개념인 것 같다. 부모로부터 정신적인 독립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내가 내 자신을 아끼고 돌보는’ 1인분의 삶의 필요성을 느끼기 좀처럼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유학을 가거나 자취 등의 이유로 독립하며 부모님과 떨어지는 계기가 발생할 때, 그때부터 1인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토양이 갖춰지게 된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 자신을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조차 서투르지만, 점차 그 삶에 익숙해지며 점점 각자에게 맞는 1인분의 삶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것은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입사원에게는 그 누구도 어떤 ‘제 몫의 일’을 바로바로 해내길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3,4년 차가 되었을 때도 ‘제 몫’을 해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문제가 된다.


2인분도,, 3인 분까지도 필요 없다.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그저 ‘1인분’이면 충분하다.


그저 내가 나 자신을 제때 먹이고, 어디 건강에 이상이 있지는 않은지 체크하고, 잠자고 쉴 공간을 마련하고 정갈하게 유지하며, 사회의 한 구석에서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어떤 건지. 어떤 것을 할 때 긴장이 풀리는지 생각해서 인생의 남는 시간을 적절히 활용하여 삶의 낙도 찾고, 스트레스 관리도 하는 거다. 이런 게 내가 생각하는 1인분의 삶이다.


 이렇듯 부족하지도, 무리하게 넘치지도 않게. 딱 1인분의 몫만 해도 인생과 사회에는 ‘제 몫’을 충분히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게 이날까?


 크게 어렵지는 않아 보이지만, 의외로 이 중 한두 부분에 있어 균형이 무너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균형이 무너지는 원인은 대부분 ‘타인에 대한 기대’에 있다. 부모님이, 연인 혹은 배우자가, 동료들이. 자신이 스스로 온전히 챙기지 못하는 스스로의 정신적인 부분을 대신 챙기고 돌봐주길 원하는 것이다.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니깐, 혼자서 먹는 밥은 맛이 없어서 대충 때우고. 혼자서 영화를 못 봐서, 꼭 누가 같이 놀러 가 줘야만 한다던가, 누가 집에 올 일도 없는데 청소는 왜하냐던가. 요리, 청소, 빨래 등의 집안일은 나중에 미래의 배우자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 지금부터 굳이 할 필요는 없다고 존재 여부가 확실하지도 않은 ‘미래의 배우자’라는 가상인물에게까지 그 책임을 미뤄둔다던가.



 최근에는, 저런 사람들을 보면 전혀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니즈를 파악하고, 해결할 기본적인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스스로의 안에서 찾지 못하는 사람들.


 이제는 남자든 여자든, 이성이든 동성이든, 누구든. 누군가와의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1인분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보다 호감이 간다. 혼자 있더라도 정성스럽게 요리를 해서 예쁜 접시에 담아 스스로에게 먹이고(ex. <혼자의 정식>이라는 책을 쓴 신미경 작가처럼), 운동을 하고, 혼자인 것에 개의치 않고 씩씩하게 영화나 공연을 보러 가는 사람들. 꼭 누군가를 초대하지 않아도, 늘 자신만 보는 공간이어도 침대를 매일같이 정갈하게 정리하고, 자신의 단정한 생활공간에서 다시 하루를 보낼 에너지를 얻는 사람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자신의 니즈를 파악하고 행복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 이렇듯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고, 돌보는 사람에게서는 왠지 모를 활기가 느껴진다.


 혼자라고 '대충' 살지 않고, 꼼꼼하고 꼿꼿하게 살아가는 그런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가급적 가까이 두고 싶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고.


 오늘도 1인분의 삶을 온전히, 성실하고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든 ‘혼자’들을 응원한다.






희망컨대, 언젠가는 꼭 1인분의 삶을 온전히 살아가고 있는 누군가와 만나 인연을 맺고 싶다. 나 또한 1인분의 삶을 잘 살아가다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과정 중에서, 2인분의 삶을 받아들이다가도, 때로는 익숙한 듯 다시 1인분의 삶을 야무지게 살아내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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