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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Sep 03. 2019

생리대가 뭐 어때서?

내가 생리대 파우치를 쓰지 않는 이유


인생에 있어서 때론 어떤 일들은,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새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나의 첫 생리는 9살에 시작되었다. 아마 성 조숙증이 있었던 것인지, 주변의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2차 성징의 징후가 빨리 찾아온 셈이다. 그렇기에 나의 생리는 시작부터 너무나 예상외였으며, 관련 배경 지식이나 타이밍의 예측이 전혀 불가한 상황이었다. 누구보다도 생리가 빨랐던 내게, 당시 상황은 어떻게 봐도 친구들에게 내가 생리를 한다는 것을 알리고 공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때문에 시작부터 나의 생리는 숨겨야 할 일이 되었다. 왠지 이렇게 남들보다 빠른 나이에 생리를 하는 게 부끄러웠고, 굳이 얘기해봤자 친구들이 뭔지도 모르니 피곤하기만 하고. 기저귀 같은 생리대를 처음 찼을 때의 생경한 느낌. 확실히 9살의 나는 생리대를 차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남녀 합반이었고, 가슴이 나오고 브라를 하는 친구들조차 아직 드물었던 상황에서 생리대를 들고 화장실에 들락거릴 순 없었다. 생리대는 휴지처럼 생기기도 했지만 뭔가 휴지 같지 않았다. 이것을 그냥 들고 다니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것을 누가 보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생리대를 꺼낼 때 유독 조심했다. 가방에서 잽싸게 꺼내 겨드랑이에 쏙 숨기거나, 바지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는 등 어떻게든 생리대의 실루엣을 가리려고 애쓰며 화장실로 쪼르르 달려가곤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로 점점 ‘나’와 비슷한 상태의 아이들이 늘어났다. 4, 5학년 때쯤에는 생리를 하는 여자아이 비율이 반 정도는 되는 것 같았고, ‘너도?’ ‘너도?’ 하는 공감대 속에서 우리는 생리대를 빌리고 빌려주는 ‘여자의 생태’에 함께 편입되었다. (‘빌린다’는 표현을 쓰지만 사실 정말 빌리는 건 아니다. 생리대를 빌려주는 것은 생리가 터졌는데 생리대가 없다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놓인 여성 동지에게 기꺼이 생리대를 제공하는 인류애에 가까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생리대를 ‘갚는다’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리대를 빌리고 빌려줄 때, 나의 유년 시절 친구들은 단 한 명도 생리대를 생리대’만’ 그냥 들고 다니던 아이가 없었다. 그녀들의 가방 속에는 항상 알록달록하거나 캐릭터가 그려진 다양한 사이즈의 파우치가 있었다. 그 파우치는 한 달에 한 번씩 그녀들의 가방 속에서, 책상 서랍에서, 교복 안주머니에서, 그리고 화장실에서 홍길동처럼 출현했다.



 대학에 들어가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대학에 가거나 직장생활을 할 때는 중, 고등학생 시절에 비해 개인 생활이 늘어나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행동반경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생리가 터졌다 싶으면 주변인들에게 빌리기보다는 바로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생리대를 사곤 했는데, 그때마다 편의점 직원들은 마치 매뉴얼처럼 하나같이 검은 봉지에 생리대를 넣어서 건네주곤 했다. (심지어 편의점에서 유상 봉투만 제공할 때조차 생리대용 까만 비닐봉지는 무상 제공이었다!) 내가 생리대를 골라 계산대에 올려두는 순간부터 캐셔 너머의 직원들은 남자건 여자건 하나같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이 은밀하게(?) 건네주는 생리대를 나는 재빨리 건네받아, 뒤에서 대기하던 손님이 혹시 내 생리대를 보진 않았을까? 눈치를 보며 빠르게 퇴장해야만 했다.



 이상하지 않았다. 생리대는 당연히 감춰야 하는 것이라고. 남들에게 보여지면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리 중이라는 것을 내 주변의 지인들에게 ‘들키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생리대를 살 때마다 감내해야 하는 민망함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첫 생리 후 20여 년을 익숙하게 생각해 오던 그 생각에 최초로 의문을 품게 된 것은, 비교적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금의 회사로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옆자리에 앉은 후배는 정리정돈이 능하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녀의 책상에 어지럽게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고, 의자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가방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뭔가 익숙한 실루엣이 하나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은 알록달록한 파우치도, 까만 비닐봉지도 씌워져 있지 않은 날 것의 생리대 그 자체였다. 처음 그 생리대를 본 순간, 나는 당황하여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혼자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여자답지 못하게.. 조심성 없기는! 남자들이 보면 어떡해. 민망해할 텐데.. 동료들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한 거 아니야?’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당시의 나는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그 후배에게 바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게 불과 3년 전의 일이었는데...



 3년 동안 세상이 바뀐 걸까, 아니면 내가 바뀐 걸까? 지금의 나는 저 때의 내가 너무도 꼰대스러웠다고 느낀다. 아마 내가 저 당시에 저런 생각을 했음에도 그녀에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지적하지 않은 이유는, ‘왜 생리대를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숨겨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까지 내게 있어 생리대는 너무나 당연하게 ‘숨겨야 하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누군가의 명확한 지시 없이 알음알음 또래 집단을 보며 여자라면 당연히 숨겨야 하는 것이라고 그저 관성적으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생리대를 당연히 숨기고 은밀히 주고받았던 여자들의 세계에 익숙해 있던 내게, 어느 날 갑자기, 후배의 어지러운 가방 속에서 무심한 듯 툭 튀어나와 있던 생리대 하나가 내 신경을 건드린 것이고.




‘뭐가 그렇게 당당해?’



 당시에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욱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생리대의 비주얼이 내게 트리거가 되었던 것 같다. 익숙하지 않은 생소한 풍경에 놀랐던 마음은 시간이 흐르며 점점 진정이 되었고, 나중에는 그때 당시 내가 느꼈던 경악과 뜨악함은 휘발되고 그저 일상의 사물들 사이에 고요히 자신의 존재감을 주장하고 있던 생리대 본연의 모습만 객관적 풍경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때 떠올렸던 내 내적 질문은 이렇게 바뀌게 된다.




‘근데 뭐 사실... 당당하지 못할 것도 딱히 없지 않나?’




 그리고 이 의문은 ‘생리대를 왜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숨겨야 되지?’ ’ 나는 왜 생리대를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딱히 나 자신을 납득시킬 만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20여 년간 생각 없이 해오던 ‘생리대 필사적으로 자연스럽게 숨기기’를 멈추기로 했다. 생리대 파우치를 황급히 꺼내 화장실로 여유로운 척 걸어 들어가면서 ‘좋아, 자연스러웠어!’ ‘아무도 내가 생리한다는 걸 눈치 못 챘겠지’라는 생각에서 나를 해방시키기로 한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생리대를 숨기지 않는다. 생리대 파우치도 쓰지 않는다. 그냥 맨 생리대를 가방에 넣어 들고 다닌다. 회사에서도 그냥 그때 그때 가방이나 서랍에서 생리대 하나를 툭 꺼내서 한 손에 들고 화장실에 털레털레 걸어간다. 남자 직장 상사가 보든, 거래처 남자 부장님이 보든, 남자 직장 동료가 보든, 후배가 보든 별로 상관없다. ‘아, 쟤 오늘 생리하나 보다’, ‘칠칠치 못하게 여자가 저게 뭐람’ 날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도 상관없다. 편의점에서 생리대를 살 때도 까만 비닐봉지 포장은 거부한다. 원래 불필요한 비닐 쓰레기는 받지 않으려 하는 편인데, 생리대를 가려주는 까만 비닐봉지는 왜 그토록 목숨처럼 필수적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혹시 생리대 회사에서 편의점들에 생리대와 묶음 패키지로 까만 비닐봉지를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


 생리한다는 것, 그게 뭐라고 여태껏 한 달에 며칠씩 이걸 신경 썼나 하는 해방감이 들었다. 내가 생리하는 게 뭐 어때서?





 +

덧붙여, ‘생리’를 부드럽게(?) 대체하는 다른 말도 쓰지 않게 되었다. ‘그 날’이라던가, ‘마법’이라던가, ‘대자연’이라던가.. ‘저 생리하는데요’라는 말을 민망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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