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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뮤 Feb 14. 2024

남편의 휴가

올 때는 빈 손으로, 갈 때는 두둑히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3개월 전에 이라크로 장기출장을 갔었는데 보름 간의 휴가를 얻어 잠시 귀국한 것입니다.


<이전 글>

https://brunch.co.kr/@seul0830/144


남편은 들어올 때 대형 캐리어 두 개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 안에 저를 위한 선물이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오산이고요. 안이 텅텅 빈 것입니다. 왜일까요. 거기에 이라크로 가지고 갈 일용할 양식을 담기 위해서지요. 캐리어 두 개로도 모자라, 화물로 부칠 이삿짐 박스도 미리 주문해 놓았더라고요.


따라서 보름 간의 휴가는 여기에 채울 것들을 준비하는데 보내게 될 여정이 되겠지요. 이라크에서는 오매불망 한국의 집을 꿈꾸고, 한국에 와서는 이라크에서 잘 지내기 위한 것들을 갖추느라 시간을 보내는,  이 아이러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하튼, 남편은 오자마자 리스트의 벽돌 깨기에 들어갔습니다. 뭐 대단한 블랙리스트 아니고요. 먹고 싶은 걸 엑셀 파일로 정리해 놓은 ‘먹자 리스트’입니다. 먹깨비인 그에게는 정부 기밀문서만큼의 중요도를 가진 일급 리스트라고 할 수 있지요. 항목을 간략히 언급하자면, 방어회, 참치회, 장어, 과메기, 순댓국, 굴보쌈, 도가니탕, 간장 게장, 양념 게장, 잡채 등등입니다.


3개월 만에 가족을 만난다는 그의 설렘에 응하기 위해서라도 작은 잔칫상 정도는 준비하는 게 먹깨비 부인으로서 도리일 것 같더라고요. 고기가 좋다는, 하지만 집에서는 꽤 먼 정육점까지 가서 상태 좋은 놈으로 직접 확인하고  정성을 다해 갈비를 재워놨는데요. 식탁에 올려놓은 갈비를 보자마자, 남편은 “또 고기야?” 하더라고요. 고기는 이라크에서 원 없이 먹고 있다나요.

우리 남편, 말 참 예쁘게 하지요?


갈비뿐이겠습니까. 미역줄기, 숙주나물, 호박나물 같은 기본 나물은 당연하고요. 더덕, 우엉, 고구마줄기처럼 손이 많이 가는 나물무침도 정성스레  준비했습니다. 친정엄마가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가뜩이나 아이들 방학으로 바쁜데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을 것 같네요.



이런 상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최고의 매너는 모든 음식을 골고루 먹어주는 것인데, 그는 좋아하는 더덕만 몇 가닥만 먹고 타깃이었던 게장에만 올인하더라고요. 원래 남편 식습관이 그런데요, 좋아하는 반찬이 있으면 그것만 먹으려고 합니다. 골고루 먹으라고 해도 소용없죠.


어차피 안 먹을 반찬, 하지 않으면 그만인데 아내의 마음이 그렇지 않은 게, 그래도 밥 위에 올려주면 조금 먹기는 하니까요. 땀을 훔치며 일단은 만들어 봅니다. 이거 뭐, 남매에 이어 아들이 또 있는 것 같은 기분인데요. 하지만 이것은 저의 생각일 뿐, 남편은 반대로 제가 딸 격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저번 글 ‘출장 간 남편이 남긴 숙제, 80일 만에 해결’에서 눈치 채셨겠지만 제가 관심 없는 것에는 심할 만큼 신경 쓰지 않는 면이 있거든요. 이렇게 서로를 거두어 준다는 자비의 마음으로 사는 부부입니다.




그럼, 남편의 먹자 리스트를 어떻게 클리어했는지부터 이야기해 볼까요. 남편은 생각보다 침착하고 치밀한 모습이었습니다. 하루 일정을 검토한 뒤 동선에 있는 맛집을 미리 찾아놓아 클리어하거나, 별다른 일이 없는 날에는 맛집을 가기 위해 하루 일정을 짜는 식입니다. 도가니탕과 방어회처럼 술 한잔이 곁들여지면 좋을 음식은 저녁 약속이 있는 날로 배분하고요.


모든 음식들이 하루 일정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며 이라크에서 일은 안 하고 이 시뮬레이션만 한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이 조금 들더군요.


좌) 도가니탕 맛집으로 유명한 종로 모 식당          우) 제철 맞은 방어회


좌) 7종 이상의 나물반찬이 함께하는 집밥      우)이라크에서 먹기 힘든 초밥


음식 하나를 영접할 때마다 나오는 결연한 표정은 너무나 진지하다 못해 경건함까지 배어 나오는 듯했습니다.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친 성도가 성당 안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첫 기도에 들어가는 모습이 이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휴가는 애초에 애견된 대로 먹자 리스트의 도장 깨기와 이라크에서 버틸 식량준비로 보냈습니다.  장어, 소고기, 삼겹살, 순대 같은 것들이에요. 가져가는 먹거리의 품목은 몇 개 안 되지만 양이 상당합니다. 이라크에 있는 또 다른 먹깨비들과 나눠 먹기 위해서예요.


저 어릴 적, 아빠는 월급날이면 노란 봉투에 담긴 치킨을 사들고 오셨어요. 치킨은 미농지 같은 얇은 종이로 둘둘 쌓여 있었는데 치킨에서 배어 나온 기름이 노란 봉투까지 물들게 했죠. 그날이면 우리는 입으로는 “어세 오세요”를 외치면서 눈은 아빠의 손으로 직행하는, 어서 오라는 인사를 아빠에게 하는지 치킨에게 하는지 모를, 정말 신나는 날었는데요.


바로 남편이 복귀하는 날이 이라크의 동료들에게 그런 날인 것입니다. 다 큰 어른들이 캐리어 주변으로 몰려들어 뭐가 나올지 기대에 찬 눈으로 침을 꼴딱 삼키는 모습을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식량은 하루가 넘어도 상하지 않을 수 있도록 꽁꽁 열려서 아이스박스에 포장해 갑니다. 비싸게 산 한우 채끝살, 등심, 살치살, 장어 등을 얼릴 때 제 마음도 같이 얼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 비싼 걸, 얼렸다 먹어야 하다니! 먹깨비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산타클로스의 마음으로 캐리어와 박스에 최대한 담았더니 비용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먹거리 준비에만 백만 원이 넘게 들어갔어요.


그 밖에도 거기에서 필요한 게 왜 이렇게 많은 건지요. 휴가 전에 바디 브러시, 쥐젖크림 같은 것들을 집에 택배로 보낼 때부터 알아봤지만 정말 세세하게 다 사더라고요. 가루치약, 국자, 집게, 가위, 폼클렌징, 물티슈, 보성 어린 녹차 잎 등등.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내는 게 타국살이의 맛이 아닐까 싶은데 그는 단 하나의 생활용품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모든 것을 세심하게 체크하며 캐리어에 욱여넣었습니다(그래서 그가 세상에서 제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기안 84입니다).  



그에 더해 정말 돈이 아까운 물건들을 샀는데 그중에 하나가 축구화입니다. 퇴근 후에 운동 겸 축구를 한다나요. 어차피 근무기간인 일 년 만 쓰고 말 텐데 그냥 운동화 신고 하라니까 부상의 위험이 있다면서 굳이 축구화를 사더군요. 분명 한국에 돌아오면 신발장에 처박힐 게 뻔한데요.


예전에도 지방 근무 때 퇴근 후 동료들과 스크린 골프를 쳐야 한다면서 골프 장갑, 골프복, 골프화 등을 줄줄이 산 적이 있어요. 서울 본사로 돌아오고 나서 그것들은 베란다에 처박힌 채 먼지만 쌓여갔지요. 잔소리를 하니, 그러면 주말마다 골프 치러 나가도 되냐고 되레 큰소리더라고요. 자기는 아이들과 함께 있어주기 위해 일부러 하지 않는 거라면서요.


 축구화도 못마땅한데 등산바지도 사야 한다고 합니다. 이유가 뭔지 짐작되실까요. 회사에서 나눠주는 근무복의 핏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는데요. 쓰면서 점점 열이 나네요. 찬물 한잔 마시고 오겠습니다.




찬물을 마셔도 진정이 되지 않지만 계속할게요. 그는 이번 휴가 때 아이들과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병에서 많이 회복한 것도 기념하고요, 아이들이 더 크면 움직이기 쉽지 않으니 첫 휴가 기념으로 가고 싶다고 간절한 눈빛으로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비행시간이 짧은 일본으로 3박4일 여행을 다녀왔어요.


여행 일정과 경비처리 등을 온전히 그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휴가기간 동안 쓴 이런저런 비용도 그의 카드로 결제하게 했는데요, 휴가 끝나는 날 그가 알려온 카드값을 들었을 때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자그마치 천만 원이 넘는 액수였거든요. 유럽여행을 한 것도 아니고,  해외 한 달 살기를 한 것도 아닌데 천만 원이라니요.


일본 여행에만 600 가까이 들었다고 하네요. 유니버설 스튜디오, 수족관 관람 등의 일정에 숙박비, 비행기값을 더하니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먹자 리스트를 클리어하는데 든 식비, 이라크에 가져갈 음식과 물건들, 그리고 몇 번의 아이들과의 외출비용을 더하니 천.. 천만 원이 넘더라고요.



키보드를 치는 저의 손에 자꾸 힘이 들어가서 이러다가 키보드가 부서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키보드의 안녕을 위해이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여하튼 남편은 저번 출국 때의 비통한 표정과는 달리 미소를 머금은 채 떠났습니다. 먹거리가 잔뜩 들어있는 이삿짐 박스와 캐리어 두 개를 가지고요. (누가 보면 이민이라도 가는 줄 알겠지만 10주 뒤에 다시 휴가 나온다는…)


참, 남편이 출국하기 삼일 전에 회사 부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는데요. 그 시간이 이라크 시각으로 새벽 4시 경임을 알고 있는 저는 회사에 무슨 급한 일이 생겼냐고 물었죠. 그 용건은 다름 아니라, 들어올 때 막걸리키트를 사 오라는 주문이었습니다. 막걸리를 제조해서 먹을 계획인 것입니다.


밤새 시원하게 막걸리를 들이켜는 꿈이라도 꾸신 걸까요. 눈 뜨자마자 부리나케 전화를 한 거지요. 남편은 하루만 전화가 늦었어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뻔했다며 그 새벽에 전화한 부장의 마음을 이해한 눈치였습니다만, 저는 끙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네요.


이라크의 먹깨비들에게 그래서 맛있게 자셨냐고 묻고 싶은 밤이군요. 그럼 저는 옛 시절 어머니들처럼 머리에 하얀 끈 좀 둘러메고 며칠 앓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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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저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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