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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뮤 Jan 10. 2024

출장 간 남편이 남긴 숙제, 80일 만에 해결

내가 생각해도 징하다

벌써 세 달이 되어갑니다. 남편이 이라크로 장기출장을 떠난지요.


그가 출국하기 전에 당부해 놓은 게 하나 있었습니다.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도록 가끔씩 시동을 걸어주라는 것이었어요.


제가 운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없으면 차를 마냥 세워둬야 하는 상황이거든요. 알았다고 해놓고는 한 달은 까맣게 잊고 지냈습니다.


한 달 반 정도 되었을 때 문득 생각났어요. '아, 시동 좀 걸어줘야 하는데.'


그리고 1분 뒤에 바로 잊었습니다.


제가 2년 동안 전신마취하는 수술을 세 번 받았거든요. 전신마취를 하면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얘기 들어보셨지요?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건 예사이고요.  때로는 큰 실수나 하지 않을까 싶어 제 자신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실제로 수술 후에 인지기능이나 기억력이 떨어질 수 있지만 일시적이며 점차 회복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요즘 부쩍 쇠퇴한 기억력이 모두 이 수술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억남과 바로 잊음을 반복하다가 두 달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의 전화가 왔을 때 신의 도움으로 시동 숙제가 생각이 나서 급하게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시동은 어떻게 거는 거야?"

" 아직도 한 번도 안 한 거야?"


남편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시동 거는 순서를 차분히 알려주었습니다. 얼른 받아 적었지요. 저도 제 기억력을 믿지 않거든요.  


그리고 그날 오후에 그 메모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또 시간이 흘렀네요?

“나 휴가 얼마 안 남은 거 알지?"

1월 중순에 남편이 보름 간의 휴가를 나옵니다. 휴가계획을 세우자는 남편의 전화에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습니다.

‘아, 시동!'


출장 간지 두 달이 훌쩍 넘어서야 숙제를 하겠다는 의지가 생겼습니다. 오늘만큼은 '기필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동을 킨다는 각오로 차열쇠를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시동 거는 순서가 생각이 안 납니다. 예전에 받아 적은 메모지를 찾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머뭇거리다가 또 다음으로 넘기게 될 거 같아 남편에게 급하게 톡을 보냈습니다.  


놀랍겠지만 아직 시동을 안 걸었어. 기억이 안 나서 그러니까 시동 거는 순서 좀 써서 보내줘.


남편이 주차장에 가서 전화하라고 합니다. 이미 배터리가 방전되었을 거라며.


그럼 어쩔 수 없고. 일단 써 보내봐.


남편은 또 '차에 가서 전화를 하라'라고 답톡을 보내왔습니다.


'아휴 그냥 써줘.'


짜증 섞인 제 톡에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더니 몇 분 후에 그에게서 톡이 왔습니다.


차문을 연다.

시동을 켠다.

가만히 지켜본다.

시동을 끈다.

문을 잠근다.


이걸 써달라는 거야?

빵 터졌습니다.

아, 대체 뭘 적으라는 건지 모르는 거구나.

이건 마치, '밥 먹는 순서 좀 적어 보내줘'라는 요청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냥 먹으면 되는 건데, 무슨 순서를 말하는 거지? 의아함을 담아 이렇게 적게 되겠죠.


숟가락으로 밥을 뜬다.

입을 벌려 넣는다.

씹으며 음미해 본다.

삼킨다.


이걸 써달라는 거야? 하고요.

저는 남편의 답톡을 다시 읽다가 '가만히 지켜본다'의 '가만히'에 꽂혀서 또 한참을 웃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드는 제가 너무 징글징글해서 오히려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이번에는 1분 만에 잊지 않고 바로 차에 가서 남편에게 보이스톡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하라는 대로 했죠. 브레이크 페달을 누르며 스타트 버튼을 누루고, 계기판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액셀 페달을 중간중간 눌러주었습니다. 두 달 훨씬 넘게 시동 한번 안 켰는데도 방전되지 않았더라고요.


이렇게 80일 만에 남편의 숙제를 해냈습니다. 80일이면 세계일주도 하는 시간인데요. 참, 징하지요?




다음 주에 남편이 보름 간의 휴가를 나옵니다. 10월 중순에 이라크에 갔으니 3개월 만에 만나는 건데요. 벌써 3개월이나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요. 하지만 "벌써 그렇게 됐어?"라고 묻지 않아야 합니다. 그건 군대 제대한 사람한테 "벌써 제대했어?"라고 묻는 것과 같으니까요.


남편은 이라크에 간지 겨우 보름 만에, 휴가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줬거든요. 도착하자마자 돌아올 생각부터 하는 그입니다. 지난달 말부터는 휴가계획이다 뭐다 해서 하루에 몇 번씩 깨톡에 영상통화를 해대는 통에 이미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 아시려나요.  


그런데 톡만큼 자주 오는 건 그의 택배입니다. 대부분은 이라크로 가져갈 것을 미리 주문한 건데요. 각종 영양제와 스타벅스 커피캡슐, 화장품, 트레이닝팬츠까지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한 장에 몇 만 원 나가는 캘빈클라인 고오급 팬티 5장과 바디 브러시가 왔을 때는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네요.


바디 브러시라....

쉰이 얼마 남지 않은 남자가 목욕할 때 바디 브러시를 쓴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조금 당황했습니다. 문득 캘빈클라인 팬티를 입고, 매혹적인 이라크 여인의 등을 바디 브러시로 밀어주는 그의 수줍은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그럴 일이 없는데,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한 제가 너무 주책스러워 머리를 저었습니다. 이라크라는 나라 특성상 회사 밖으로 외출이 엄격히 금지되어서 쓸데없는 염려는 안 해서 좋습니다.


1년 있으면 돌아올 건데, 별게 다 필요하구나. 부처의 자비심을 빌려 이해를 거듭해 봅니다.


어제는 이삿짐용 대형 박스가 왔습니다. 그의 일용할 양식들을 넣어 이라크로 가져갈 박스들입니다. 이제는 공유를 떠올리게 해서 그 이미지가 달라진 ‘도깨비’가 아니라 배통통 ‘먹깨비’이거든요. 저번 남편에 대해 쓴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없으면 우울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남자입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생겼는데 제가 협조해 주지 않으면 회사 부도라도 맞은 것 같은 절망의 얼굴이 되는 그입니다.


지난 3개월 동안 남편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진지한 얼굴과 자세로 먹고 싶은 음식들을 리스트업 해놓았을 것입니다. 저번에는 엑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리스트를 저에게 살포시 보내줬는데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지만 그의 발끝도 못 따라가는 저로서는 ‘끙’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오늘도 그의 택배가  왔습니다. 돋보기를 쓰고 박스 송장에 깨알만 하게 인쇄된 글씨를 읽어봅니다.


'00 팩토리, 쥐젖 크림'


거참, 별게 다 필요… 부처님의 자비를…    에라잇.


저는 기독교인인데 왜 자꾸 부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는 걸까요. 쥐젖 크림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앉아 책을 핍니다. 이제 조용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책장을 천천히 넘기며 이 고요한 시간을 음미해 봅니다.


그런데 평안한 호젓함이 아니라 폭풍전야의 긴장감이 자꾸 독서를 방해하네요. 어디선가 부릉부릉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옆방에서 오줌 마려운 강아지가 낑낑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결국 도깨비 아닌 먹깨비 신부는 책을 덮습니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뭐가 있는지 훑어봅니다. 옷방으로 들어가서 먹깨비의 겨울옷을 점검해 봅니다. 괜스레 집안 구석구석을 훑어봅니다. 그의 위시 리스트가 순탄하게 클리어되도록 종합 점검에 들어가는 먹깨비 신부.


먹깨비의 먹부림 현장에서 1열 직관하다 보름 뒤에 돌아오겠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얼마큼, 먹었는지 보고 드릴게요. 3킬로 정도 찐 살과 함께요.







<남편의 장기출장 편>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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