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뮤뮤 Aug 14. 2024

퇴장당한 미용실 다시 찾아간 이야기

미용실에서 퇴장당하기는 처음 ep.2

지난 6월에 발행한 '미용실에서 퇴장당하기는 처음' 에세이, 두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안 읽으신 분은 1편부터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https://brunch.co.kr/@seul0830/332


'석 달 뒤에 다시 오라'는 미용실 원장님의 주문을 충실히 따를 수 있을지 알았다. 그러나 퇴장당한 지 보름 만에 갑갑증이 올라왔다. 작년 겨울에 머리를 다듬은 게 마지막이었으니 이미 참고 참은 끝에 '영연하다'를 방문한 것이었다. 석 달을 다시 있으려니 거울을 볼 때마다 고역이었다. 반곱슬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장마 기간 곱슬의 부스스함은 떠돌이 강아지의 몰골을 연상케 한다. 붕 뜨다 못해 가발을 얹어 놓은 것 같을 때도 있었는데 동생은 일본 애니 ‘엉덩이 탐정’이 생각난다고 했다. 정말이지 이슬아 작가처럼 일어나자마자 문 연 미용실에 쳐들어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참아낸 것은 저번 글에 '석 달 뒤 방문 리뷰를 기대한다'를 댓글이 무려 15개가 넘게 달렸기 때문이다. 그렇다. 150개 아니고 15개! 하지만 한 명의 관객을 위해 혼신을 다해 노래를 하는 무명가수처럼, 나는 150명 아닌 15명의 독자를 위해 혼신의 힘으로 이 척박한 시간을 인내했다. 그러다가 어떤 일로 사진을 찍을 일이 생겼는데 이 몰골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영연하다'에 컷 예약을 하고 방문했다. 퇴장당한 지 두 달 만이었다.


영연 님은 거울을 닦고 있다가 미용실에 입장하는 나를 보자마자 재빨리 샴푸실로 안내했다. 몸에 밴 빠릿빠릿함이 여전했다. 저번에는 야구 모자를 쓰고, 파란 셔츠에 와이드 팬츠를 입어 중성적이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줬었는데 오늘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풍성하게 레이스가 달린 흰색 면 블라우스에 흐르는 선이 유려한 흰색 새틴 롱스커트 그리고 작은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새틴과 진주의 우아하지만 자칫 너무 드레시할 수 있는 느낌을 귀여운 디자인의 면 블라우스로 눌러주어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었다. 거기에 트렌디한 플랫 메쉬 슈즈로 시원하고 편안한 느낌까지. 완벽한 매치다! 그녀의 패션감각에 흠칫 놀라며 샴푸실 의자에 앉았다. 생각해 보니 이 미용실을 선택한 이유는 그녀의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저번에는 그렇게 한참을 옥신각신 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샴푸부터 하는 걸 보니 머리를 자를 수 있나 보다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약속한 3개월이 안 되었는데 이렇게 순순히 머리를 잘라주다니... 혹시 내 글을 읽은 건 아닐까.' 이 정도면 망상 수준이다.


순조로운 진행에 안심하며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냈다. 열 마디의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나을 때가 바로 이런 순간. 모호하게 원하는 이미지를 설명하는 것보다 사진을 딱 제시하는 것이 원장님과의 의사소통을 매끄럽게 도우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난생처음 미용실 가기 전에 연예인 사진을 준비했으니 바로 배우 김난주의 사진이었다.



그런데 사진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혹시 되지도 않은 김난주 사진을 내밀어서 기가 찬 걸까. 불안한 마음에 사족을 붙였다.


이 정도 길이면 제 머리에서 가장 가깝게 나올 수 있는 스타일 같아서요. (제가 김난주 얼굴이 아니라는 건 분명히 압니다)

다시 한번 난처한 표정을 짓는 영연 님, 드디어 입을 열었다.

김난주 님의 이 머리 스타일은 솔직히 좀 촌스러워요. 손님 머리가 더 이쁘신데, 굳이 촌스러운 머리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아... 또 시작인가. 창과 방패의 대결. 미용실 원장님은 내 머리가 자꾸 예쁘다고 하고, 당사자는 그렇지가 않고, 대체 문제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촌스럽다고요? 예쁜 거 같은데.

손님은 머리끝이 지금처럼 바깥으로 뻗는 게 예쁜데요. 이 머리를 하려면 끝을 잘라내야 하잖아요. 앞머리도 더 기르는게 좋을 건데 잘라내야 하고요. 지금으로서는 자를 게 없는데... 아, 어쩌지. 컷 하신다고 해서 일단 샴푸부터 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여차하면 오늘도 퇴장당할 것 같다. 그럼 샴푸 비용만 내고 나가야 하나. 애매하다. 사진도 찍어야 하지 않는가. 무조건 컷을 받기로 결심을 굳혔다. 아니, 그런데 내 돈 내고 내 머리 좀 자르겠다는데, 이게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머릿결이 너무 상했는데 펌을 해달라고 조르는 것도 아니고 컷만 한다는데! 갑자기 그 간의 못난이 시절이 다 까다로운 원장님 때문인 것 같아 욱하는 기분이 들었다. 연예인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스타일을 지켜야 할 일인가.


물론 화를 내지 않았다. 나는 꽤 점잖은 사람이니까. (후아)

그럼 이렇게 하죠. 반년 넘게 컷을 안 받아서 머리끝이 지저분하니까 끝만 '아주 살짝' 다듬고요. 제가 오늘 사진 찍을 일이 있으니 드라이를 좀 해주시는 걸로요.


그럴까요하면서 '드디어' 영연 님이 가위를 들었을 때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내가 머리스타일을 바꾸지 않기로 해서인지 그녀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미소를 지은 채 사사삭 머리끝을 자르며 그녀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이 차가운 느낌이니까 그 매력을 살리세요.


내가 무얼 들었지 했다. 따듯하다도 아니고 차갑다는 다소 부정적인 느낌의 말을 이렇게 초면에, 면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단 말인가?

제가 차가운 느낌인가요?

네네.

혹시나 싶어 다시 물었는데 정확히 다시 짚어주었다.


차가운 느낌 때문에 귀여운 머리 스타일은 안 어울리고요. 여성스러운 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오히려 촌스러워 보일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머리 스타일은 사실 여성스러운 스타일이었다. 길고 웨이브가 살짝 진 우아한 느낌. 한두 번 해본 적은 있는데 딱 어울린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래도 워낙 좋아하는 스타일이어서 다시 한번 해보고 싶었다.


아 원장님, 저 사실 여성스러운 머리 스타일을 좋아하는데요. 길고 웨이브 있는 스타일이요.

음, 너무 무거워 보이고 그렇게 예뻐 보이지 않을 거예요. 머리를 화려하게 하는 사람이 어울리는 사람도 있는데 손님은 아니에요. 머리에 무언가를 많이 하지 마세요. 중성적이고 세련된 느낌으로 가는 게 좋아요. 지금 이 스타일, 잘 찾으셨어요.

나는 벗어나고 싶은 헤어 스타일인데 원장님은 딱 이것이라니 어리둥절한 마음에 영연 님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뭐가 좋은지 계속 흐뭇한 표정이다.


목이 파인 옷이 잘 어울려요. 가슴이 파인 시원한 디자인으로 더 길어 보이게 하세요. 사람들이 와 키 크다, 늘씬하다 생각하지 목이 파인 것을 보지는 않거든요. 남들이 안 입는 독특한 디자인의 옷을 소화할 수 있고 그런 옷이 손님의 매력을 부각해 줄 거예요. 살을 많이 드러내는 옷이 좋아요. 섹시한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옷을 입어도 야해 보이지는 않을 거예요. 차분한 화려함이라고 할까요. 전체적으로 그런 느낌이 잘 어울리실 거예요.


한숨도 멈추지 않고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모습은 마치 무당에게 갑자기 그분이 와서 줄줄 점괘를 읊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맑은 광인의 눈이란 게 저런 것인가. "감각이 있으신가 봐요."라고 나는 약간 어안이 벙벙해서 말했다. 그 짧은 시간에 나를 파악했다니. 그러고 보면 나도 그녀의 스타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찰하고 평가 내리는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냥 보이는 대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연예인은 전문가들이 스타일 조언을 해주지만 일반인들은 그러기 힘들잖아요. 이렇게 조언해 드리면 다들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머리만 예쁘다고 끝이 아니거든요. 그 사람의 얼굴형, 체형, 분위기와 어울려야 하고, 옷차림도 같이 조화를 이루면 더 스타일리시하니까요.

그랬다. 원장님은 스타일에 아주 진심인 분이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문득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앵커 누구 닮으셨어요. 누구더라.

생각이 날듯 말듯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는 영연 님은 진정 즐거워 보였다. 게임할 때 가장 즐거운, 8살 둘째의 표정과 비슷했다.




이 자리를 빌려 영연 님께 말씀드립니다. 큰 도움이 되었어요. 저는 제가 조금은 섹시한 줄 알았거든요. 미소가 따듯한 줄 알았고요.


농담이다. 유쾌한 시간이었다. 내 스타일에 대해 그렇게 진지한 조언을 받는 일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누군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관찰하는 것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골똘한 얼굴로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을 고르던 순간은 황송하면서도 설레었다. 영연의 공간에서  머리도 자르고 다른 무언가도 받아온 것 같다.


사실 그녀가 권하는 '남들이 안 입는 옷'을 입는 것은 오래전부터 해오던 일이다.  그런 옷이 눈에 들어오고, 입어도 주변의 반응이 나쁘지 않기도 했는데, 가끔 '그런 옷은 (대체) 어디서 사?'라는 질문을 받을 때는 칭찬인지 놀리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 주춤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확신을 가져도 되겠다. 오늘 영연 님의 미감을 믿고 남들이 잘 안 입을 만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당당히 도서관에 다녀왔다. 살이 많이 드러나고 가슴이 파인 끈나시였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섹시하지 않다는 그녀의 말이 진짜였다.




커버사진 -픽사베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