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에서 퇴장당하기는 처음 ep.2
지난 6월에 발행한 '미용실에서 퇴장당하기는 처음' 에세이, 두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안 읽으신 분은 1편부터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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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뒤에 다시 오라’는 원장님의 지시를 따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퇴장당한 지 보름 만에 갑갑증이 밀려왔다. 작년 겨울에 머리를 다듬은 게 마지막이었고, 이미 참고 참아 ‘영연하다’를 방문한 것이었으니, 다시 석 달을 참으라는 건 무리였다.
반곱슬인 사람은 알 것이다. 장마철 곱슬머리의 부스스함이란 떠돌이 강아지 몰골 그 자체다. 가끔은 가발을 뒤집어쓴 듯 뜨기도 했는데, 동생은 내 모습을 보며 일본 애니 ‘엉덩이 탐정’이 떠오른다고 했다. 정말이지, 이슬아 작가처럼 일어나자마자 문 연 미용실에 쳐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참아낸 건, 지난 글에 달린 댓글 때문이었다. ‘3개월 뒤 방문 리뷰를 기대한다’는 글이 무려 15개나 달렸으니까. 그래, 150개가 아니라 15개! 하지만 나는 한 명의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무명가수처럼, 그 15명을 위해 이 척박한 시간을 버텼다.
그러다 사진을 찍을 일이 생겼고, 이 상태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 끝에 결국 ‘영연하다’에 컷 예약을 넣었다. 퇴장당한 지 두 달 만이었다.
영연 님은 거울을 닦다 말고, 나를 보자마자 재빠르게 샴푸실로 안내했다. 몸에 밴 빠릿함이 여전했다. 저번엔 파란 셔츠에 야구 모자, 와이드 팬츠로 중성적이고 경쾌한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전혀 달랐다.
풍성한 레이스의 흰 블라우스, 유려하게 흐르는 새틴 롱스커트, 진주 귀걸이까지. 드레시함을 귀여운 면 블라우스로 눌렀고, 트렌디한 플랫 메쉬 슈즈로 시원한 마무리까지. 완벽한 매치였다. 나는 다시 한번, 이 미용실을 선택한 이유가 그녀의 스타일 때문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이번엔 별다른 마찰 없이 샴푸에 들어간 걸 보니, 머리를 잘라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 글을 읽은 건 아닐까?’ 약속한 석 달이 되기 전에 순순히 받아주는 이 상황—망상인 걸 알면서도 슬쩍 기대가 피어올랐다.
조심스레 휴대폰을 꺼냈다. 열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나을 때가 있다. 설명 대신 배우 김난주의 사진을 보여주면 의사소통이 수월하리라 생각했다. 난생처음 미용실에 연예인 사진을 준비해 간 날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혹시 내가 김난주 사진을 들이밀어서 황당했던 걸까? 부랴부랴 사족을 붙였다.
“이 스타일이 제 머리에서 그나마 가능할 것 같아서요. 물론 제가 김난주 얼굴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영연 님은 잠시 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난주 님 머리 스타일은... 좀 촌스러워요. 손님 머리가 훨씬 예쁘신데, 굳이 촌스러운 머리를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하아, 또 시작인가. 원장님은 자꾸 내 머리가 예쁘다고 하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느끼고, 이건 대체 누구의 착각인가.
“촌스럽다고요? 전 예뻐 보여서요.”
“지금처럼 바깥으로 뻗는 게 예쁜데요. 저 스타일을 하려면 끝을 잘라야 하잖아요. 앞머리도 잘라야 하고. 자를 게 없어요. 아, 어쩌지... 컷 하신다고 해서 샴푸 먼저 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또 퇴장당할 분위기였다. 샴푸 비용만 내고 나가야 하나, 애매했다. 사진도 찍어야 하니, 무조건 자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진짜, 내 돈 내고 내 머리 자르겠다는 데 왜 이렇게 애를 먹는가!
물론 화는 내지 않았다. 나는 꽤 점잖은 사람이니까. (후아)
“그럼 이렇게 하죠. 머리끝만 아주 살짝 다듬고요, 드라이는 예쁘게 부탁드릴게요. 오늘 사진 찍어야 하거든요.”
“그럴까요.”
영연 님이 드디어 가위를 들었다. 그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내가 머리 스타일을 바꾸지 않기로 해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한결 밝아졌다. 가위질을 하며 그녀가 말했다.
“손님은 얼굴이 차가운 느낌이에요. 그 매력을 살리세요.”
차가운?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따듯하다도 아니고, 차갑다고?
“제가 차가운 느낌이에요?”
“네네.”
다시 물어봤는데도, 그녀는 정확히 다시 짚었다.
“그래서 귀여운 스타일은 안 어울려요. 여성스러운 것도요. 오히려 촌스러워 보여요.”
사실 나는 여성스러운 스타일을 좋아한다. 길고, 웨이브가 있고, 우아한 느낌. 몇 번 시도했지만 어울린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래도 좋아해서 자꾸 시도하게 되는 스타일.
“저 사실 그런 머리를 좋아해요. 길고, 웨이브 있는 거요.”
“음... 손님은 머리를 화려하게 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무거워 보이고, 예뻐 보이지 않을 수 있어요. 중성적이고 세련된 느낌이 잘 어울려요. 지금 이 스타일, 딱이에요.”
나는 벗어나고 싶은 스타일이었는데, 그녀는 이게 정답이란다. 어리둥절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흐뭇한 얼굴이었다.
“목이 파인 옷이 잘 어울려요. 파인 디자인으로 더 길어 보이게요. 사람들은 그걸 안 보면서도 예쁘다고 느껴요. 그리고 남들이 안 입는 옷도 잘 소화하실 거예요. 살을 많이 드러내는 옷이 좋아요. 섹시하지 않으니까 야해 보이지도 않아요. 차분한 화려함, 딱 손님 스타일이에요.”
멈추지 않고 쏟아지는 조언을 들으며, 나는 마치 점을 보는 느낌을 받았다. 맑은 광인의 눈—어쩌면 영연 님은 미용계의 무당일지도.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말했다.
“감각 있으신가 봐요.”
그 짧은 시간에 나를 파악하다니. 그러고 보니 나도 그녀의 스타일을 스캔하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냥 보이는 대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연예인은 전문가 조언을 받지만, 일반인은 어렵잖아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다들 좋아하시더라고요. 머리만 예쁘다고 되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면 스타일리시하니까요.”
영연 님은 스타일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그 진심이 나를 퇴장시켰고, 또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앵커 누구 닮으셨어요. 누구더라...”
생각날 듯 말 듯한 표정의 그녀는 정말 즐거워 보였다. 8살 우리 둘째가 게임할 때 짓는 얼굴과 꼭 닮았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자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저는 제가 살짝 섹시한 줄 알았거든요. 미소도 따듯한 줄 알았고요.
…농담이다. 유쾌한 시간이었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나를 관찰해주고, 맞춤 조언을 해주는 경험. 그건 참 오랜만이었고, 황송하면서도 살짝 설레는 일이었다. 머리를 자르고, 나는 무언가를 더 얻어온 기분이었다.
사실 그녀가 말한 ‘남들이 안 입는 옷’은 원래부터 내가 즐겨 입던 옷이었다. 단지 주변의 질문—“그런 옷은 어디서 사?”—에 자주 주춤했을 뿐.
하지만 오늘 확신을 얻었다. 나는 영연 님의 미감을 믿기로 했다. 그녀의 말대로, 끈나시 하나 입고 도서관에 갔다. 살이 많이 드러난 옷이었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 말이 맞았다. 나는, 섹시하지 않았다.
커버사진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