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좋아하는 옷을 골라 입었다. 플리츠 원단으로 만든 베이지색 원피스이다. 여름날이었지만 어쩐지 몸이 으슬하여 흰색 린넨셔츠를 원피스 위에 걸쳐 입었다. 이것도 내가 즐겨 입는 옷이다. 신발장 문을 열고 신발들을 쭉 훑어본다. 좋아하는 아이템들을 몸에 걸치면 어쩐지 나쁜 기운이 상쇄될 것만 같았다. 신중하게 신발을 고르는데 둘째가 와다다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이거 가지고 가.”
작은 손안에 꼭 쥔 무언가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키링이다. 남편이 해외출장 갔을 때 사온 자물쇠 모양의 키링인데, 아끼는 마음에 장식장 안에 모셔 두었던 것이다. 왜 이걸, 이 순간에 엄마한테 줄 생각을 했을까. 엄마의 초조함을, 다섯 살 난 아들도 느낀 걸까.
행운의 부적을 받은 것처럼 난 키링을 가만히 손에 쥐어 보았다.
'날 지켜줘.'
호흡을 고르고 병원에 들어섰다. 크지 않은 병원이지만 동네에서 가장 손님이 많은 내과이다. 주말 아침이어서 더더욱 사람이 많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 데스크로 가서 이름을 말하자 컴퓨터를 조회하던 간호사의 눈이 커졌다.
“왜 이제 오셨어요. 빨리 오셔야 되는데…”
일주일 전 대장내시경을 받았다. 혈변이 2년 넘게 계속되던 중이었다. 내시경이 끝나고 의사는 촬영한 나의 장 내부를 보여주었다. 여기저기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아니, 빨간 정도가 아니었다. 어떤 부분은 암적색에 가까웠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한눈에 상태가 안 좋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 의사가 화면을 멈추었다. 혹처럼 한 부분이 부풀어 있었다.
“정장제를 먹어도 변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하셨죠. 직장이 이렇게 부어있어서 그런 거였어요. 거의 다 막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번이 세 번째 시도한 내시경 검사였다. 혈변이 시작되었을 때 내시경을 하려 했는데, 정장제를 먹어도 변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정장제를 들이부어도 변은 나오지 않고, 구역질만 나오고 심한 오한에 기절할 것 같았다. 결국 약속된 내시경 예약시간까지 장을 비우지 못했다. 의사는 약이 맞지 않으면 그럴 수 있다며 다른 약을 주었다. 혹시 암은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시도도 실패로 끝났다. 암은 아닌 것 같다는,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이후로 한동안 병원을 찾지 않았다.
'그래, 좀 안 좋을 거라고 생각은 했어. 그래도 약 먹고 치료받으면 괜찮겠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불길한 단어가 자꾸 입안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그럴 일이 없었다. 그렇게 큰 불행은 나에게 오지 않는다.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의사가 화면을 보다 내 얼굴을 보다 몇 초쯤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어요.”
빠르게 뛰던 심장이 순간 멈추는 것 같았다. 입안에 맴돌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암인가요?”
의사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조직검사를 최대한 빨리 진행해 달라고 할게요.”
아닐 수도 있다는 말만 마음에 담았다. 내 인생은 어느 편이냐 하면 정말 평범한 편이다. 엄청나게 좋은 일도 없었지만, 아주 나쁜 일도 당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렇게 넘어갈 것이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안정되고 좀 지루하기도 하지만 나의 평범한 일상이 계속될 것이라고.
병원에서 연락이 온 건 내시경 검사를 받은 지 겨우 삼일 뒤였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저희가 좀 빨리 진행해 달라고 했거든요. 지금이라도 병원에 오시면 되요.”
알겠다고 하고 가지 않았다. 간호사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낮고도 급한 목소리가 좋은 소식을 알려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이들을 깨워 아침밥을 먹여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고, 집을 청소하고, 장을 보고, 저녁상을 차리고, 여느 날과 같은 일상을 유지했다. 어쩌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른다. 불행이 예정되어 있다면 되도록 천천히 맞는게 현명하다. 일상의 말을 하고, 일상의 행동을 해야 널뛰는 심장을 겨우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끔씩 머릿속이 하얘졌고, 입안이 말랐다. 며칠 뒤 사형선고를 받게 될 죄수의 심정이 이러할까. 자포자기하는 마음에 숨이 멎을 것 같다가도, 신이 보내준 천사가 구원해 줄 것만 같은 기대 섞인 희망에 다시 숨을 쉬었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여느 주말과 똑같은 아침이 시작되었다. 식사를 마친 가족들은 거실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첫째는 소파 제일 구석에 앉아 책을 보고, 둘째 는 레고에 열중해 있다. 남편은 길게 누워 티브이를 본다. 병원갈 채비를 마친 나는 거실의 나른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이 예정된 불행일지, 아니면 가슴을 쓸어내릴 에피소드가 될지 조금 뒤면 확인을 하게 될 것이다.
"다녀올게."
현관 쪽으로 걷다가 거실을 뒤돌아보았다.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