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실에서 사람들과 섞여 앉았다. 전면에 대장암의 전조증상 10가지라고 적힌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 쉬어도 풀리지 않는 피로
- 혈변
- 자는 도중에 쥐가 자주 남
- 지속적인 열
- 배변습관의 변화
...
10가지 중 무려 7가지가 해당됐다. 그동안 암 전조증상을 검색해 봤을 때 해당되는 부분이 적어 안심하곤 했는데, 병원의 저 체크 리스트에는 해당되는 것이 갑자기 왜 이리 많은 건지, 의아했다. 결과가 안 좋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 간호사의 낮은 목소리, 빨리 오라는 전화. 모든 것들이 한 가지 답으로 모아지는 느낌이었다. 부인하고 부인했지만 눈앞에 떡 놓여 있는 포스터가 이제 각오하라는 최후의 메시지 같았다.
왜 그동안 나를 방치했는지 그제야 후회가 밀려왔다. 혈변이 그렇게 오래 지속되었는데도, 툭하면 열이 나고 피곤함에 몸을 주체하지 못했는데도, 남편이 몇 번이나 병원에 가보라고 말했는데도, 무엇보다 나 자신이 심상치 않음을 여러 번 느꼈는데도.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원인을 알아낼 의지가 없었다. 힘도 없었다. 몸에 이상이 있다고 느꼈을 때, 이미 나는 우울의 심연에 가라앉고 있었다. 마음의 병에 이어, 몸의 병까지 무게를 더해, 마치 바위를 단 것처럼 더욱 바닥을 향해 나아갔다. 잠자리에 누울 때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던 나날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알면서도,
매일 생각하면서도,
벼랑의 끝을 향해 질주했다.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순간이 온 걸까, 삶을 사랑하지 않은 죄 말이다.
불행을 최대한 늦게 맞으려다가, 그 불행을 더욱 키운 건지, 아니면 신이 정신 차리라고 이런 이벤트를 마련한 건지, 아직도 희망을 놓지 않은 나는 후자이길 바라며 마른침을 삼켰다.
빨리 이 시간이 끝나게 내 차례가 왔으면 하다가도, 영원히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을 오가는 수만 가지 생각에 머리가 터질 거 같을 때마다, 의사의 "아닐 수도 있어요"를 자꾸 상기했다. 아들이 준 키링을 다시 꽉 쥐어보기도 했다.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렸다. 면담실 문을 열자마자 재빨리 의사의 표정을 살폈다. 웃지 않는다. 항상 웃는 낯으로 환자를 맞는 분인데, 굳은 표정으로 내 인사를 받았다.
아, 맞구나.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사고는 정지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자리에 앉자 의사는 그때 봤던 내시경 영상을 다시 보여줬다. 저번과 비슷한 설명이 이어졌다. 의사의 말이 언어가 아닌 윙윙 거리는 소리가 되어 저 멀리 아득하게 들렸다. 손에 난 축축한 땀을 원피스에 닦는 순간 의사의 말이 갑자기 귀에 확 꽂혔다.
"검사결과 암이에요. 직장암"
이미 알고 있던 답임에도 "암이라고요?" 되물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장암이에요. 이미 많이 진행된 상태 같아요. 내일이라도 빨리 큰 병원에 가보셔야 할 거 같아요. “
의사는 의뢰서를 써줄 테니, 서류를 받는 대로 빨리 병원을 알아보라고 다시 당부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저 멍했다. 대기실에 우두커니 서있는데 간호사가 다가오더니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조직검사결과지와 진료의뢰서 같은 서류들이 필요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며 속삭이듯 말했다. 간호사의 손길은 감사했지만 이 분위기가 낯설고 어색했다. 난생 처음 받는 종류의 위로였다. 이게 정말 현실인가 주변을 둘러보는데 데스크에 서있는 다른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안쓰러움과 걱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병원문을 나서는 순간 이 악몽이 깨길 바랐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