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병실, 죽음이 제 마음대로 문을 여는 곳

by 뮤뮤


일 년간의 사투가 무색하게도, 아버지의 CT 결과지에 ‘전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히 박혔다. 폐를 떠난 암세포는 어느새 신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더 이상의 항암은 무의미하다는 선고. 의사는 폐암이 이래서 무서운 거라며 건조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방법은 정말 없냐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지 않았을 뿐 우리는 처절하게 매달렸다. 하지만 원래도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의사는 헤어질 결심을 굳힌 오래된 연인처럼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죽음의 데이터 속에서 슬픔을 효율적으로 차단하는 법을 익혀온 사람. 어쩌면 그 냉담함은 무력한 의학적 한계 앞에서 그가 선택한 최선의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더 이상 애쓰지 말자고 했다. 항암을 중단하자 아버지는 급격히 허물어졌다. 거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던 거친 숨소리. 가정용 산소탱크로는 역부족이었고, 우리는 서대문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항암을 받았던 병원에서 연결해 준 그곳은, 말하자면 ‘죽음 직전의 정류장’ 같은 곳이었다. 행성의 화려한 불빛이 닿지 않는 외곽의 정거장. 치료가 무력해진 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마지막 버스를 기다리는 장소였다. 좁은 병실 안에는 제 궤도를 이탈해 이곳에 불시착한 사연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옆방에는 왕년에 미인이었을 법한 노년의 여성이 누워 있었다. 술장사를 하며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이제야 사람답게 살아보려니 간이 다 망가져 있더라는 이야기. 그녀에게는 보험도, 실비도, 곁을 지킬 가족도 없었다. 한 달에 육백만 원이라는 거액의 병원비를 쏟아부으며, 그녀는 죽도록 번 돈을 자신의 죽음을 사는 데 쓰고 있었다.


어떤 죽음은 너무 일러 애처로웠다. 아버지의 옆 베드에는 췌장암 선고를 받은 스물여덟의 청년이 있었다. 마약성 진통제의 기운이 옅어질 때마다 청년은 짐승 같은 비명을 쏟아냈다. 얇은 커튼 하나로 나뉜 공간에서 그 비명은 여과 없이 내 귓가에 꽂혔다. 젊은 부모는 그 상황이 익숙한 듯 낮은 목소리로 아들을 달랬고, 타인의 고통을 견뎌낼 재간이 없는 나는 속절없이 두 귀를 막곤 했다.


청년이 떠난 자리에 백 세가 넘은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할아버지의 눈동자는 꺼져가는 촛불 같다가도 찰나의 순간 또렷해지곤 했다. 따님이 못 오는 날은 사위가 간병을 교대했다. 그는 좁은 병실의 시간이 지겨운 듯 연신 무거운 한숨을 뱉어냈다. "아휴..." "아이고야..." 누군가 숨을 거두기만을 기다리는 아이러니한 풍경. 그곳은 대체로 조용하다가도 하루에 한 번은 누군가의 비명이, 혹은 보호자의 싸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구의 것이던 한숨과 비명이 뒤섞인 공기가 병실 구석구석을 채웠다. 죽음을 기다리는 이의 지루함과 죽음이 들이닥친 이의 절박함이 고작 얇은 커튼 한 장, 침대 하나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그 비좁은 틈 사이로 생의 끝자락들이 위태롭게 교차했다. 이미 삶의 모든 페이지를 다 넘긴 백 세의 노인과 이제 막 인생의 후반부를 채워가던 아버지가 각자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삶의 무게가 기우는 방향은 인간의 짐작과는 달랐다. 결국 백 세 할아버지의 가느다란 숨줄기보다, 아버지의 숨이 먼저 멎었다.

생의 길이에 상관없이 죽음은 제 마음대로 정류장의 문을 열었다. 짐을 싸서 병실을 나갈 때, 그 좁은 곳에서 서로의 사투를 지켜봤던 할아버지의 딸이 말없이 내 어머니를 안아주었다. 지난여름의 일이었다.


두 번의 수술과 서른한 번의 방사선, 스물한 번의 항암을 통과한 나는 가끔 위험한 상상을 한다. 다시 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면, 차라리 스위스행 비행기를 타겠노라고. 알프스의 절경을 눈에 담고 품위 있게 마침표를 찍고 싶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호사스러운 욕심인지도 잘 안다. 그 정류장에 모여 있던 이들 중 어느 누가 그 비좁은 베드 위에서 죽음이 가까워지는 걸 온몸으로 느끼며 떠나고 싶었을까. 그 베드 위에 내 모습을 투영해 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곳을 빠져나오며 나는 생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그 정류장에 다시는 내리지 않는 것.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내 생의 안온한 순간에도, 혹은 짙은 우울이 나를 잠식하는 시간에도 불쑥 찾아와 묻는다.

'정말 그곳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운동장 트랙을 돌거나 기구 위에서 땀을 흘릴 때, 옆 베드에서 비명을 지르던 청년의 마른 등과 사위의 한숨을 견디던 백 세 노인의 퀭한 눈동자가 불쑥 발밑에 놓인다. 다시는 가지 않겠노라 다짐하면서도, 자꾸만 그 정류장의 풍경을 되뇌는 모순. 망각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 기억의 무게를 근육의 힘으로 바꿔내는 수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곳의 비명과 한숨을 등 뒤에 업고 내 생에 허락된 궤도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잊고싶은곳잊을수없는곳


*커버이미지_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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