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세 시대에 다시 서른이 되는 것

by 뮤뮤


회색 구름이 가득한 하늘 아래서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요즘 유행한다는 나이 계산법 때문이다. 기대 수명이 120세까지 늘어났으니 지금 나이에서 0.8을 곱해야 한다는 논리, 혹은 아예 스무 살쯤은 빼야 맞다는 이야기들. 그 계산법을 따르면 나는 이제 막 인생의 전반전을 끝낸 서른이 된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특히 나처럼 5년이라는 시간을 병마와 싸우느라 멈춰 있던 사람에게 ‘120세 시대’라는 소식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신이 몰래 건네준 보너스 점수 같았고, 거칠게 다듬어 온 내 인생의 원고를 다시 쓸 수 있게 해주는 유예기간처럼 들렸다.


‘서른이라니, 그럼 나는 아직 뭐든 시작할 수 있는 나이 아닌가!’


하지만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서른으로 살라는 말이 주는 그 다정한 응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쉰을 서른으로 치환하는 건, 어쩌면 너무 해맑은 계산법일지도 모른다. 서른의 서사는 패기와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굴러가지만, 쉰의 서사는 그보다 훨씬 무겁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서른의 실수는 다음 문장을 위한 가벼운 쉼표였으나, 쉰의 실수는 자칫 문장 전체를 닫아버리는 마침표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이 시기의 실수는 단순히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행성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나만 빈손으로 도착한 건 아니었다.

번듯한 외투를 입은 동년배들도 자세히 보니 소매 끝이 해져 있다. 가방 속에는 각자의 병명이나 퇴직 권고, 혹은 자식 문제와 부모의 병시중 같은 묵직한 '삶의 주석'들이 달린 인생 원고를 한 뭉치씩 품고 있었다. 본문은 우아해 보일지 몰라도, 페이지 하단마다 차마 다 읽지 못한 비명이 각주처럼 달려 있는 원고들. 다들 멀쩡한 척 연기하여 사는 곳, 그게 내가 도착한 쉰의 행성이다.




젊음이라는 무상 임대 기간은 끝났다.

한순간의 나태함에도 몸은 냉정하게 탄력을 거두어간다. 땀 흘려 대가를 지불해야, 체력이라는 영토를 겨우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속도를 읽어내는 일조차 이제는 공부가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스며들던 지식들이 이제는 따로 애쓰지 않으면 입안에서만 겉도는 외국어가 되기 십상이니까.


그런데 공짜가 없다는 말은, 뒤집어보면 내가 지불한 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거저 주어지는 젊음은 사라졌지만, 정직하게 흘린 땀은 속도는 느릴지언정 내 몸에 근육으로 남는다. 읽고, 이해하고, 외우는 일도 더뎌졌을 뿐, 충분히 가능하다. 무상 임대 기간이 끝난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내 땀으로 지불한 진짜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빨간 펜을 다시 집어 들고 내 인생이라는 원고의 첫 장을 넘긴다. 눈물과 땀으로 잉크가 번져버린 5년의 페이지를 가만히 쓸어본다. 마감까지는 아직 수십 장의 백지가 남아 있다. 120페이지짜리 책이라면 50페이지 지점에서 주인공이 잠시 길을 잃는 건 극의 재미를 위한 필수 장치일 수도 있다.


나는 오타투성이인 인생 원고를 파기하지 않고 그저 다음 장을 이어서 쓰기로 한다. 화려한 문장의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닐지라도, 잠시 멈춰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것들을 기록하는 관찰자로 남고 싶어서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70년이 될지, 그보다 짧은 계절이 될지, 조이는 마음으로 가늠해서 무엇할까. 분명한 건, 성취를 증명하려 허공을 더듬는 짓은 이제 그만두겠다는 사실이다. 쉰, 마침표를 찍기엔 너무 이르고, 서른이라 우기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나이. 뜨거운 확신보다 서늘한 의심이 더 익숙한 시기, 어쩌면 반짝이는 기적보다 묵묵한 일상의 가치를 깨달은 나이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선명해진다.

요행은 통하지 않고, 오직 내가 지불한 땀방울만큼만 내 영토가 되는 투명한 나이.

나는 오늘도 기구 위에 올라가 내 몸에 근육이라는 자본을 새긴다. 그것만이, 오타투성이인 내 인생의 다음 장을 써 내려갈 유일한 동력임을 믿으면서.


#오십,제대로살아주리라



커버사진_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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