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마흔에 대해 유독 말이 많다. 불혹이라느니, 인생의 정점이라느니 하며 온갖 의미를 가져다 붙인다. 하지만 쉰에 대해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한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한두 장 읽다 덮어버린 오래된 소설책처럼 취급받는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서러운 법인데, 이제는 아예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 사회적 배경의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은 꽤 서늘하다. 마치 그 이후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세계, 혹은 더 이상 서사를 부여하지 않아도 되는 지루한 단계처럼 말이다.
가만히 그 숫자를 발음해 본다. '쉰'. 왜 하필 발음이 쉰 인 걸까. 마치 쉰이라고 말하는 순간, 어디선가 시큼한 쉰내가 날 것만 같다. 인생이 상하기 시작했다는 노골적인 경고음 같기도 하고, 이제는 잘 씻어도 가려지지 않는 세월의 냄새가 배어 나올 것만 같아 괜히 코끝을 찡긋거려 본다.
마흔아홉의 마지막 날을 앞두고, 대학동창과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우리가 정말 쉰이 되긴 하네.”
“그러게. 마흔에 대해서는 꽤 생각하며 살았는데... 쉰은 정말 남의 일인 줄만 알았지.”
우리는 각자 통과해 온 서른과 마흔의 매듭을 떠올렸다.
서른은 이제 더 이상 아이처럼 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고, 마흔은 남은 기회를 붙잡고 한 번 더 달려보겠다는 결심이었다. 그건 삶을 조금씩 고쳐 쓰고 채워 넣는 ‘수정’과 ‘보완’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쉰은 다르다. 내 삶이 나도 모르는 새 반환점을 돌았다는 불안이 엄습한다. 예전엔 어떻게든 움켜쥐려 했던 것들이 이제는 손가락 사이로 가볍게 빠져나간다. 누군가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내 인생의 페이지를 과격하게 데스킹(Desking)하고 있다는 얼떨떨한 기분. 항의하고 싶지만 데스크가 누군지 몰라 입만 벙긋거리는 신입 기자가 된 기분이랄까.
나이 먹는다는 건 하나씩 잃어가는 일이라고 한다. 매끄러운 피부나 팽팽한 활기가 사라지는 것. 여기저기 예고 없이 찾아오는 통증들. 그것도 충분히 서글픈 일이지만, 진짜 문제는 내가 자긍심을 가졌던 무기들까지 숫자의 칼날 앞에 놓였다는 사실이다.
머리 회전 속도는 예전보다 굼뜨고, 몸은 수시로 무겁다. 지적 순발력과 재치는 무뎌졌으며, 넘어져도 금세 튀어 오르던 스프링 같은 회복력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하철 노선도의 작은 글씨가 흐릿해 폰트를 키울 때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웅얼거림으로 들려 "뭐라고?"를 연발할 때마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나의 총명함이나 회복력 같은 무기들이 사실은 소장판이 아니라, 일정 기간이 지나면 만료되는 ‘구독형 서비스’였다는 것을, 내가 가진 명랑성조차 잠시 빌려 썼던 소모품이었음을, 나는 이제야 겨우 인정한다. 나의 주력 무기들을 다 반납하고 나면, 나는 무엇으로 이 세상을 통과해가야 할까. 그 폐허 뒤에는 대체 무엇이 올까.
쉰이라는 숫자가 주는 이 막막한 폭력 앞에서 나는 대답 대신 취재 수첩을 펼친다. 어쩌면 나이 듦이란 무작정 잃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비로소 ‘진짜’만 남겨야 하는 지독하게 냉정하고도 엄격한 편집 과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 ‘진짜’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 헤드라인조차 뽑지 못했다. 현장 스케치 한 줄도 버겁다. 다만 분명한 건, 이 낯선 행성의 대기는 생각보다 서늘하며 내 취재 목록에는 아직 기록해야 할 생경한 상실들이 줄 서 있다는 사실이다.
이 행성에서 나만 이렇게 길을 잃은 걸까. 쉰이라는 고약한 편집자를 만난 다른 이들은 어떤 문장을 버리고, 어떤 문장을 끝내 지켜내고 있을까. 그게 못 견디게 궁금해지는 밤이다.
#쉰의행성에서길을잃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