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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슬 Aug 30. 2018

상실의 순기능

연애의 끝

루와는 5 주년 하고 일주일 정도 더 사귄 뒤 헤어졌다. 

그러니까 헤어짐을 각오한 건 5주년 기념일이었고, 일주일 남짓 헤어짐을 보류하다 결국엔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다. 우리가 헤어지던 날 루가 나에게 한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어쩌면 평생 잊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루는 처진 눈가에 맺힌 눈물을 꼭꼭 삼켜가며 “우리가 어떻게 헤어져”라고 말했다. 

나는 눈물을 참지 않고 뚝뚝 떨구며 “그러게 우리가 헤어지네” 하고 대답했다.      


우리는 헤어졌다. 


5년 동안 눈물 콧물 빼가며 열심히 사랑했는데 결과는 이별이었다.

특별하다고 자부했던 우리의 관계가 이토록 아주 평범하고 허무하게 정리될 줄 알았다면..

알았다면 뭐, 알았어도 별 수 없이 열심히 사랑했겠지.


우리는 자타공인 쿵짝이 잘 맞는 커플이었는데 어느 정도로 쿵짝 쿵짝 잘 했느냐면, 

2000일 가까이 사귀면서 말다툼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우리가 헤어졌다는 얘기를 들은 친구는 너흰 내가 꿈꾸던 사랑의 유토피아였는데 어쩜 그럴 수가 있느냐며 굉장히 허탈해했다.     


애석하게도 사랑의 유토피아 같은 건 없었고, 설사 있더라도 결국 우리는 아니었다.     


나는 루가 정말 좋았다. 

같이 있으면 갑자기 가슴이 둥둥 울려서 사랑한다고 하지 않으면 못 배길 만큼 좋아서 어느 날은 열 번도 넘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루, 사랑해. 루 손목에 있는 타투까지 사랑해." 


그러면 루는 배시시 웃으면서 얼른 손목의 타투를 가렸다. 

나는 손목을 가리는 루의 손을 억지로 치운 뒤 타투 위에 뽀뽀를 퍼부었다. 

루 손목에 새겨진 타투는 전 여자 친구의 이니셜이었다. 

루는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한참이 지난 뒤 손목에 그녀의 이름을 새겼다고 했다. 

절대로 잊고 싶지 않아서 아주 두꺼운 필체를 골랐다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나랑 헤어지고 나서는 내 이름을 이마에 새겨달라고 했다. 이니셜 말고 궁서체로. 

루는 알겠다고 대답하면서 우리는 헤어질 일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루는 판다와 자연과 나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다. 

루는 사랑하는 것들 앞에서 눈물을 숨기는 법을 자주 잊었다. 

인터넷으로 본 판다의 애교가 치명적일 땐 여지없이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함께 드라이브를 하다가 멋진 경치가 나오면 루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바깥으로 내밀곤 했는데 

루의 관자놀이 부근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으로 루가 울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어느 날 밤, 영상통화를 하던 중에 루가 갑자기 불을 끈 적이 있다. 

왜 그러냐고 물으며 불을 켜라고 말 해도 루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 자야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푸하하 웃으면서 너 또 울지? 하며 놀렸다. 루는 아니라고 잡아떼다가 한참 후에 불을 켰는데 화면에 비친 루의 코 끝이 벌게져있었다. 길고 까만 속눈썹도 눈물에 뭉쳐있었다.

이실직고하기를 우리가 연인이라는 사실이 새삼 감격스러웠고 그러다 보니 내가 너무 보고 싶어 져 눈물이 났는데 울면 내가 놀릴까 봐 불을 껐다고 했다. 

나는 혹시 그의 이름의 마지막 글자 ‘루’가 눈물 루(淚) 자는 아닌지 늘 의심스러웠다. 

우는 남자는 딱 질색이었지만 루는 사랑할 때만 우는 남자였으므로 그의 눈물은 언제나 기꺼웠다. 

루는 우리가 헤어지는 날에도 사랑한다며 많이 울었다.     


이따금씩 나에게 루와 헤어진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땅히 해 줄 말이 없어 난감하다. 

루와 헤어진 이유는 백만 가지인 동시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루와 헤어진 후 나의 하루는 240시간으로 늘었다. 

단 한 번도 나를 루로 꽉 채운 적이 없었는데, 루 하나 빠져나간 나는 텅 빈 허허벌판이었다. 

나는 주어진 거라곤 시간뿐인 허허벌판의 한가운데에 누워, 아무리 써도 절대 줄어들지 않는 시간을 쓰는 기분으로 한참을 살아야 했다.     


며칠을 그렇게 보내다가 정신을 차리고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루와 헤어졌고 나는 시간에 눌려 질식해 죽어버리기 직전이니 내 시간 좀 같이 써달라고. 

친구는 나를 교회로 데려갔다. 

그 날 목사님의 말씀 주제는 ‘토대’였다. 인간세상에서 토대 삼아 믿고 의지했던 것들은 필연 흔들리고 변하기 마련인데 그럴 때 좌절하지 말고, 변치 않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라는 말씀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내가 절대 견고함을 믿었던 토대가 정말로 무너졌다는 사실은 분명해서 눈물이 났다. 

그러다가 나 또한 루의 무너져버린 토대라는 사실이 미안해서 또 울었다. 

사랑하는 동안 루에게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약속했던, 이제는 거짓말이 되어버린 지난날의 진심들을 회개했다. 나는 이렇게 한 순간에 뒤돌아 떠날 거면서 어쩌자고 그런 약속들을 쉽게 해버린 걸까. 

루가 그 약속들을 실수로라도 다시 기억해 내 상처받지 않기를 십자가 앞에 빌었다. 

그 날 나는 하나님께 루를 보살펴달라고, 우리의 추억들에 루가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루와 헤어지고 난 뒤 나는 벌처럼 내려진 240시간을 채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움직였다. 

회사에 두 시간씩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그 주에 해야 할 일들을 처리했다. 

분야를 막론한 책들을 많이 사고 많이 읽었다. 어떤 날은 잠에서 깨어서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책을 읽었다. 

평소에 관심 없던 장르의 음악들을 찾아 듣고 콘서트를 예매했고, 스포츠라면 학을 뗐던 내가 야구장이며 축구장을 부지런히 다녔다. 친구의 친구들의 친구들까지 만나면서 약속을 잡아 7주 치 주말을 만남으로 채웠고, 

넷플릭스의 온갖 드라마와 쇼를 섭렵했다. 

일본어를 새로 배우기 시작했으며 가죽공예에도 흥미를 붙여 가죽 작품을 두 개나 만들었고, 

주짓수를 하루에 다섯 시간 씩 하면서 첫 대회에서 메달을 따기도 했다. 


나와 같이 사는 친구가 그런 나를 보며 진화 중이냐고 물었다. 

포켓몬으로 따지자면 나는 피카추에서 라이츄가 되어가고 있는 중일지도 몰랐다.      


산처럼 쌓인 시간 더미들을 작은 삽으로 부지런히 퍼 나르며 필사적으로 살다가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순간들이 찾아왔다. 그럴 때면 나는 무력하게 주저앉아 머리 위로 하염없이 쏟아지는 시간과 외로움과 후회들을 오롯이 맞아야 했다. 아무리 많은 걸 손에 쥐고 있어도 사랑하고 있지 않아서 나는 자주 공허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랑 하나만 할 때는 가슴이 벅차 힘들 정도였는데

나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기가 힘들었다.  

어쩌면 시작부터 잘못 설계된 양팔저울을 가슴에 지고 살아가느라 이렇게 힘든 건가 싶었다.

애초에 사랑을 담은 접시가 바닥에 단단히 붙어서 반대쪽에 무엇을 아무리 많이 담아도 절대로 기울어지지 않을 양팔저울.      

기울어진 접시 위에 아무리 많은 것을 높게 담아봤자 우루루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헛수고를 모른척하며 계속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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