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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슬 Jul 16. 2019

이상한 열흘

그러니까 그건 쏜과 함께 보는 세 번째 아침이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쏜에게 “술 마실래요?” 하고 물었다. 쏜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대답은 않고 망설이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그 애를 보고 있자니 거절당할까 봐 겁이 났지만 애써 여유 있는 척하며 “술 사줄게요” 했다. 쏜은 약간 말을 늘이며 대답했다. “그..... 럴까요?”     

 

몇 개월 동안 거의 매일 보면서도 가벼운 이야기 한 번 제대로 나눠본 적 없는 쏜과 가까운 술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주 보고 앉는 자리가 어색하고 긴장이 되어서 입이 자꾸만 말랐다. 그래서 계속 맥주를 마셨다.

우리는 첫 번째 술집에서 500cc 맥주잔을 각자 다섯 잔씩 비웠고 2차로 간 술집에서 500cc 맥주를 다섯 잔 씩 더 마셨다.

각자 5000cc의 맥주를 마셨음에도 왜인지 둘 다 전혀 취하지 않았다. 시간은 새벽 네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경기도에 사는 쏜의 막차는 이미 끊긴 지 오래였다. 나는 쏜에게 마침 우리 집이 비었으니 자고 가라고 말했다. 쏜은 이번엔 망설이지도, 말을 늘이지도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천천히 내가 사는 옥탑을 향해 걸었다.      


가진 옷 중 가장 커다란 옷을 쏜에게 건넸다. 내가 입을 때는 엉덩이를 덮고도 한참 아래로 내려오는 반팔 티셔츠가 쏜의 몸엔 잘 맞았다. 쏜은 내 옷을 입고 우리 집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 그래도 우리 무지하게 어색하고 낯 사이라는 사실은 여전했다. 익숙한 내 공간이 이 커다란 남자애 하나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뒤틀려 보였다.

나는 내 방에 쏜의 잠자리를 봐준 뒤 잘 자라고 말하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잤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쏜에게 문자가 와있었다. 새벽 여섯 시쯤 그 애가 보낸 문자에는 <얘기 좀 하실래요? 잠이 안 와서요>라고 쓰여 있었다. 불면증을 앓고 있다던 쏜의 말이 생각났다.

낯선 곳에서 자려니 더 힘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짧게 생각한 뒤 가스레인지를 켜 가자미조림을 데웠다.

가자미조림이 알맞게 익었을 때 자고 있는 쏜을 깨웠다. 까치집 머리를 한 약간 부은 얼굴의 쏜은 전날 새벽보다 몇 배는 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 애 앞에 잠옷 차림으로 앉아 가자미조림을 흰 밥에 올려 먹었다.

전 날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인지 입 안이 깔깔해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저를 내려놓고 쏜이 밥 먹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쏜은 수저에 밥을 왕창 올려 한 입에 넣더니 가자미조림을 손톱만큼만 곁들여 먹었다.

다섯 살짜리 애처럼 밥을 먹는구나 생각했다. “밥을 정말 크게 많이 먹네요. 반찬은 조금만 먹고요.” 내 말에 쏜은 밥을 되게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밥을 다 먹고 난 뒤 쏜은 샤워를 해도 되는지 물었다. 편하게 욕실을 쓰라고 대답했다.

쏜이 자리에서 막 일어났을 때 내가 노브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몇 달을 목례만 하던 그냥 아는 사람과 잔뜩 풀어진 모습으로 아침밥을 같이 먹고 있다니. 그것도 무려 가자미조림을.

소파에 앉아서 그 애가 씻는 소리를 들으며 정말 이상한 상황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쏜은 재워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출근했다.

그 애가 나가고 난 뒤 호랑이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날 저녁, 공짜 영화표가 생겨 쏜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본 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우리는 새벽까지 카톡을 주고받았다. 굿나잇 인사로 대화를 끝맺었을 때, 동네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냈다. 아무래도 쏜과 썸을 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니 친구들이 오버하지 말라며 들뜬 나를 진정시켰다. 전날 밤 둘이서 맥주 1만 cc를 마신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친구 한 명은 그럴 거면 차라리 약을 하지 그랬냐고 경악했다. 쏜과 내가 왜 썸이 아닌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친구들의 카톡을 읽다가 잠에 들었다. 그날 밤 꿈에서 쏜과 야하게 키스했다.   

    

며칠 후 또다시 쏜과 둘이서 술을 마셨다. 각자의 술자리가 파한 뒤 합정동의 편의점에서 만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한 갑이 넘는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10캔 정도 마셨다. 출근하는 어른들과 등교하는 학생들 여럿이 편의점을 들렀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쏜에게 우리 집에서 자고 출근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쏜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조금 취한 우리들은 내가 사는 옥탑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리가 풀려 거실에 대짜로 뻗었다. 쏜도 내 옆에 누웠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서 이야기를 해주거나 이야기를 들어줬다. 쏜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주 큰 편이라고 자랑했다. 나는 쏜에게 소리를 크게 질러보라고 말했다. 그 애는 숨을 크게 들이쉬어 배에 힘을 주더니 잠깐 동안 멈춰서 소리를 지를지 말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못하겠다며 몸에 힘을 빼고 웃었다. 무용을 하는 쏜에게 클럽에서도 춤을 잘 추느냐고 물었다. 쏜은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맘만 먹으면 춤으로 유혹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쓸데없이 비장한 그 애의 표정너무 웃겨서 한참 웃었다.

쏜과 얘기를 하던 중에 몇 번이나 깜빡 잠에 들었다. 그러면 쏜은 잠든 나를 몇 번이흔들어 깨웠다. 나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이만 들어가서 자라고 말했다. 쏜은 조금 더 얘기를 하다가 자고 싶다고 대답했다. 불면증을 앓고 있다던 말이 생각나서 그 애 얘기를 조금 더 듣다가 더는 졸음을 못 이기겠어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잤다.      


몇 시간 잔 뒤 나왔더니 쏜이 거실에서 자고 있었다. 거실에 대짜로 뻗어 자고 있는 그 애가 너무 커서 안 그래도 좁은 우리 집의 거실이 더 좁아 보였다. 나는 쏜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쏜을 깨웠다. 잠에서 깬 쏜은 자연스럽게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선크림을 바르며 그 애가 씻는 소리를 들었다. 참으로 이상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데자뷰를 겪는 기분이었다.     


쏜과 밖걷다가 메세나폴리스에 있는 소바집에 들어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틀 밤이나 같은 집에서 잠을 잔 사이였지만 여전히 쏜이 너무 어색하고 불편해서 나는 내 몫의 소바를 반도 먹지 못했다. 쏜은 소바 그릇과 돈까스 접시가 반짝이도록 싹싹 긁어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쏜이 일하는 카페에 가서 각자 할 일을 했다.

나는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해 시간이 되면 저녁 같이 먹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얼마 후 카페로 찾아온 친구는 테라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쏜을 흘끗 보더니 쟤 귀엽다고 작게 말했다. 나는 말을 듣고 그냥 웃었다.     


친구와 술을 한 잔 하면서 쏜과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다. 친구가 그게 도대체 무슨 사이인 거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날 밤 친구와 클럽에서 춤을 추며 놀던 중에 쏜이 한 말이 떠올랐다.

“저는 마음만 먹으면 춤으로 유혹하지 못할 사람이 없어요.”

그 애의 비장한 표정을 떠올리니 웃음이 났다. 쏜에게 클럽에서 함께 놀지 않겠느냐고 카톡을 보냈다.

한 시간쯤 지나 쏜이 클럽으로 들어왔다. 우리 셋은 반갑게 인사하며 맥주병을 부딪쳐 건배했다.

한참을 놀다가 새벽 한 시 쯤 되었을 때 쏜이 막차를 타러 나가봐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조심히 들어가라고 말하며 멀찍이서 손을 흔들었다. 만취한 내 친구는 쏜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조심해서 들어가라고 귓속말을 했다. 쏜은 조금 당황하다가 친구 어깨를 살짝 안고 토닥여주었다.

쏜보다 더 당황한 나는 둘의 모습을 못 본 척했다. 이게 당최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쏜이 한 말이 머리를 스쳤다. “저는 마음만 먹으면 춤으로 유혹하지 못할 사람이 없어요.”     


다음날 노트북을 들고 쏜이 일하는 카페에 갔다. 쏜과 함께 담배를 피우는데 쏜이 내 친구와 주고받은 짧은 카톡을 보여주었다. 그 애가 말했다. “저 할 말 되게 많아요.” 나는 오늘 저녁에 술 한 잔 하자고 대답했다.

카페에서 일을 하며 쏜의 퇴근을 기다리는 동안 그 애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다. 왠지 자꾸만 초조해져서 애꿎은 냅킨만 잘게 잘게 찢었다.

      

우리는 술집에서 내 친구 이야기를 했다. 쏜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해서 나는 아무래도 가 그쪽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쏜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더는 쏜과 존댓말을 하면 안 될것 같아서 나는 이만 말을 놓자고 했다. 말을 놓고 잔뜩 편해진 우리는 깔깔 웃으며 소주를 다섯 병이나 마셨다. 쏜과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내내 내 인생은 어쩌자고 이렇게 재미있는 걸까 생각했다.

그날 밤 막차를 놓친 쏜에게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말했다.

이제 쏜은 우리 집에서 아무 일 없이 곧잘 자고 가는 몇 명의 남자 사람 친구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우리는 기분 좋게 취해서 별 것도 아닌 얘기에 심하게 키득거리며 내가 사는 옥탑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쏜과 나는 같은 방에 나란히 널브러져 별 얘기를 다 했다. 술에 취해 꼬부라진 혀가 잘 말을 듣지 않았다.

천장이 핑글핑글 돌았다. 나는 혀가 꼬부라진 김에 내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 투성이인지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실 네가 오래전부터 조금 좋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내 친구가 너한테 반해버릴건 뭐냐고 내 인생 너무 재미있지 않냐고 말했다.

내 얘기를 들은 쏜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게 정말이냐고 물었다. 그 애가 가볍게 웃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반응에 조금 당황해서 왜 그러느냐고 말했다.

쏜이 약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오랫동안 좋아해 왔다고 말했다. 나는 그 와중에 내 친구가 걱정이 되어서 걔는 그럼 어쩌냐고 물었다. 쏜이 사실 내 친구와는 아무 일 없었다고 나를 떠보고 싶어서 꺼낸 얘기라고 말했다. 친구 얘기를 듣고도 내가 덤덤해서 많이 속상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쏜은 내가 많이 좋다며 내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쏜의 심장 뛰는 소리가 정말로 들렸다. 빠르게 뛰는 그 애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내 인생은 역시 재미있구나 생각하며 한참안겨있었다.

날이 밝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건 쏜과 함께 보는 세 번째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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