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이슬 Jul 22. 2019

연애의 속도

하여튼 사랑은 할 때도 피로하고 안 할 때도 피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타의적 솔로로 30년 가까이 살아온 말야와 간헐적이며 선택적인 몇 번의 솔로 생활을 해 본 나는 참 많은 시간을 사랑이야기에 할애했다. 어느 봄,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사람이 없었던 우리는 홍대를 걸으며 스치는 연인들을 복잡한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역시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아 존나 사랑하고 싶다.” 말야가 한숨과 함께 토하듯 한 마디를 뱉었다.

‘존나’ 사랑이 하고 싶다니! 진심으로 가슴이 아팠다. 말야가 29년 동안 쌓아둔 사랑의 크기란 도대체 얼마나 거대할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만약 사랑이 물성을 가졌더라면 얘가 쌓아둔 사랑 재고는 필히 다 무르고 썩어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에도 금융상품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너 지금까지 못 쓴 사랑 다 적금 들어놓고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 생겼을 때 통장 꺼내서 보여주면 얼마나 좋아? ‘봐! 너만을 위해 이렇게 내가 사랑을 모아뒀어, 이자만으로도 평생은 행복할 수 있어’ 완벽한 프러포즈 아니냐?”

말야가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맞아, 나 사랑으로만 부의 값을 매기면 세계에서 제일 부자야 진짜.”     


나는 사랑에도 신용등급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하는 사람을 편리하게 거를 수 있지 않을까. 내 말에 말야가 적극적으로 공감하며 덧붙였다. “맞아, 소개팅에서도 ‘혹시 사랑 신용등급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1등급인데.. 아.. 파산이시라고요..? 안녕히 계세요.’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얼마나 깔끔해.”     

말야가 내 이상형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나 같은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말했다. 연인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 머리 아프게 밀당 따위 하지 않고 사랑할 땐 그냥 사랑해버리는 사람. 그리고 많이 화끈하면서 약간 소심한 사람.

말야가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도 나 같은 사람 만나고 싶어.”

문득 우리가 너무 변태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었다. 말야와 나는 어쩌면 나르시시스트여서 연애를 못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서로의 애인 없음과 나르시시즘을 아프지 않게 비하하며 한참을 웃고 떠들던 중에 갑자기 말야가 연애를 시작하면 어쩌지 싶었다. 얘까지 연애하게 된다면 나는 분명히 더 외로워질 터였다.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 같은 날에 연애 시작하자. 남은 사람이 외로워지지 않도록”

말야가 비장한 얼굴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하느님이 외로운 나르시시스트 둘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일까 우리는 정말로 같은 날 연애를 시작했다. 

애인이 생긴 다음 날, 말야에게 전화가 왔다. 휴대폰 화면에 뜬 그 애 이름을 보며 이 비극적(?)인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잠시 걱정했다. 잔뜩 미안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는데 말야가 나보다 더 미안한 목소리로 어제부터 연애를 시작해버렸다고 고백했다. 나는 완전히 홀가분한 마음으로 내 연애 소식을 전하면서 첫 키스나 첫 섹스는 같은 날 하지 말자고 말했다. 우리는 이 상황이 정말로 변태 같아서 깔깔 웃었다. 

어쨌든 서로의 연애를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랑에 취해 지내던 어느 날 말야에게 연락이 왔다.

“너 나를 잊었구나? 행복하냐?”

나는 사랑하느라 너무 행복하고 바빠서 너를 생각할 겨를이 단 1초도 없었다고 그러나 전혀 미안하지는 않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말야도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 없는 사랑을 푸념하던 애랑 있는 사랑 얘기를 하려니 말도 못 하게 좋았다. 말야가 키스는 했냐고 물었다. 연애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다.

“야, 키스 안 했냐?”

“응........넌 했어?”

“뭔 개소리야, 섹스를 지금 몇십 번 했는데”     

말야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면서 자기는 아직 포옹도 못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더 소스라쳤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 애 말을 들으며 이럴 줄 알았으면 첫 키스랑 첫 섹스도 같은 날 하자고 약속할 걸 그랬나 하고 조금 후회했다. 

나는 키스하고 싶은 건 맞냐고 물었다. 말야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그래도 아직 자는 건 조금 무섭다고 덧붙였다. 지난날 남자랑 섹스하고 싶다고 힘주어 말하던 말야의 허세가 떠올라 비웃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했다.

“아직 포옹도 안 한 애가 뭘 자는 걸 걱정해. 그거 개오버야”

“그래도 자자고 그러면 어떡해?”

“안 자면 되지”

“근데 오빠가 지나가는 말로 집에 놀러 오라고 그랬다?”

“근데?”

“그럼 자자는 거 아니야?”

“한 달 동안 포옹도 안 한 사람이? 그거 진짜로 집에서 놀자는 뜻일걸? 네 남친 뽀로로야 혹시?”

     

나름 심각하게 속앓이 하는 애를 놀린 게 조금 미안해서 남자친구가 잘해주냐고 물었다. 말야는 남자친구가 건새우 마늘쫑 볶음을 직접 요리해서 선물해줬다고 말했다. 건새우 마늘쫑 볶음은 말야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엄청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연애의 속도는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니 너무 고민하거나 사서 걱정하지 말고 너의 속도에 맞춰 연애하라고, 너의 남자친구는 만난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건새우 마늘쫑 볶음을 해주는 따뜻한 인간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말야와 전화를 끊고 나니 벌써 애인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있었다. 서둘러 신발을 신으며 가방에 든 소지품을 살폈다. 가방 안 주머니에 콘돔 하나가 들어있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가 콘돔 한 갑을 추가로 챙겼다. 현관문을 닫으면서 하여튼 사랑은 할 때도 피로하고 안 할 때도 피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확실히 사랑하며 피로한 쪽이 100배는 행복한 것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상한 열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