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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슬 Jul 30. 2019

죽음의 반대편으로 달리는 사람

사람이 죽기 전에 어떤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줄 알아?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탁꾸가 지하철 출구를 막 빠져나오고 있었다. 밝게 웃는 그의 표정이 먼저 보였고 다음으로 지난겨울보다 조금 마른 그 애 몸이 보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힘 있는 그 애의 양팔에 반가움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걸으며 바쁘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너무 오랜만에 본다는 말이 서로의 입에서 너무 많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조금 걷다가 마주친 허름한 노포에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아 소주 한 병과 불고기 안주를 시켰다. 전날 저녁부터 한 끼도 먹지 못했다며 중국산 김치 반찬에 공깃밥을 허겁지겁 비우는 그 애를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밥공기를 다 비운 탁꾸가 이제 조금 살 것 같다고 말하는 동시에 주문한 불고기 안주가 나왔다. 나는 내 몫의 밥공기를 탁꾸 앞으로 놓아주었다. 빈 잔에 소주를 따르며 오늘 하루도 고됐느냐고 물었다. 그 애는 새삼스럽게 당연한 질문을 왜 하느냐고 가볍게 핀잔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탁꾸는 몇 시간 전에도 자신이 담당하는 베드 위에서 어떤 환자가 죽는 것을 보았댔다. 징후가 좋았는데 돌연 사망한 환자를 보며 잠깐의 슬픔과 오래갈 것 같은 무력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 애는 가득 찬 술잔을 비우고 뜨거운 불고기를 한 점 입에 넣고는 다시 한 번 살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제는 몸이 으스러진 어린아이가 실려 왔다고 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그 아이의 허물어진 살갗을 봉합하고 으스러진 뼈들을 추스르고 터진 내장을 수습해 보았지만 아이는 결국 죽었다고 했다. 부모는 심하게 울면서 내 아이를 왜 살려내지 못했느냐며 화를 냈다고 했다. 그 전 날엔 고등학생 남자애가 온몸이 부서진 채로 실려 왔다고 했다. 죽으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다던 그 아이는 죽지 못하고 다만 부서졌다.

그 애가 두 번 다시 걷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부모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꾹꾹 눌러 내리며 살려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했댔다.


죽고자 했지만 죽지 못한 채로 살아서 온 사람들과 더 살아야 했지만 (혹은 더 살고자 했지만) 살지 못한 채로 죽어 실려 온 사람들을 탁꾸는 하루에 몇 번이고 마주한댔다. 너는 그럴 때마다 어떤 기분이 드냐고 묻고 싶었는데 그 기분을 말로 표현 한들 내가 다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내 질문에 그 애는 언젠가의 심폐소생술을 떠올렸다.

도저히 가망이 없어보이는, 그러니까 이미 생명의 끈을 놓고 힘없이 늘어진 환자의 가슴 께를 규칙적으로 강하게 압박하며 탁꾸는 생각했다고 한다. 어쩌면 내가 이 사람을 확실하게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애는 그런 말을 불고기를 씹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이제 더는 슬프지 않은 거냐고 물었다.

“요즘도 자주 울어” 건조하게 말하는 탁꾸를 보며 얘는 그저 울음을 들키지 않는 것을 너무 잘하게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나는 탁꾸가 얼마나 눈물과 애정이 많은 애인지를 그리고 얼마나 마음 약한 애인지를, 그래서 얼마나 자주 무너져 내리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애가 죽음 앞에서 이토록 덤덤해질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울었던 걸까. 가늠할 수 없었다.


우리는 말없이 각자의 담뱃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은 약간 쌀쌀했다. 우리는 서로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각자가 가진 라이터가 있었음에도 그냥 그렇게 했다. 탁꾸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더니 말했다.

“슬, 사람이 죽기 전에 어떤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줄 알아?”

“어떤 말을 해?”

“똥 마렵다. 목마르다. 졸리다.”

“허무하네”

“허무하지”     

영화에선 죽음을 앞둔 사람이 그야말로 영화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던데 현실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심플했다. 그 사람들은 잠시 후 자신이 영원히 눈을 감게 되리라는 사실을 짐작했을까. 생생한 욕구를 느끼면서 천천히 숨을 거두며 죽어가는 시간은 어떤 것일까. 그 순간은 과연 깊을까, 얕을까, 캄캄할까 아니면 눈부시게 환할까. 잠깐 동안 나의 마지막을 상상해보았다. 갓난아기와 다를 바 없이 무력하게 누운 채로 태어날 적보다는 단단하고 힘 있는 혀로 똥이 마렵다고, 목이 마르다고, 그리고 졸리다고 천천히 말하는 어느 날의 내 모습이 뿌옇고 흐릿하게 그려졌다. 어쨌든 지금은 죽고 싶지 않았다. 꾸준하고 일정한 보폭으로 찾아오고 있을 죽음을 그래도 이왕이면 지금과 아주아주 먼 곳에서 마주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만약 가까운 시일 내에 죽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멋진 인사 한마디 못 남기고 떠밀리듯 죽기는 죽기보다 싫다고 생각했다.


담배를 다 피우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며 탁꾸에게 말했다. 언젠가 죽을 만큼 크게 다치더라도 너의 병원 근처에서 다치진 않겠다고, 혹여 너의 병원 근처에서 사고가 나더라도 죽을힘을 다 해 네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어지겠다고. 탁꾸가 재수 없는 소리라며 침을 세 번 뱉으라고 다그쳤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세 번 침 뱉는 시늉을 했다.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죽음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구나”

내 말을 들은 탁꾸가 맞네 하며 슬프게 공감했다. 나는 너무 우울한 말을 해버린 것 같아 방금 뱉은 말을 정정했다.

“아니,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죽음에서 멀어지려고 가장 열심히 뛰어다니는 사람이야”

탁꾸가 어우 뭐야 스으을~ 하며 소주잔을 들어 보였다. 경쾌하게 잔을 부딪친 우리는 동시에 한 입 가득 소주를 털어 마셨다. 소주의 쓴 맛이 가시자  감미료의 달콤함이 혀끝부터 목구멍까지 옅게 남았다. 탁꾸와 내 앞에 놓인 작고 투명한 소주잔을 바라보며 너와 나의 삶에 들어찬 힘듦이나 우울 같은 것들도 결국엔 달콤한 흔적만 남기고 빠르게 사라지기를 하고 바랐다. 어느새 퇴근한 사람들로 가득 찬 가게 안이 시끌벅적했다. 아마 저들도 우리처럼 각자의 고유한 속앓이를 털어내는 중일 터였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보랏빛이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변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또 한 계절을 무사히, 그리고 촘촘하게 살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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