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기억이 시작될 무렵부터 한참 동안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가난한 어른들이 낳은 가난한 아이들은 동네 복지관에서 무료 공부를 마친 뒤 공짜 밥을 얻어먹고 좁고 기다란 아파트 복도나 낡아 허물어져가는 놀이터에서 부모를 기다리며 놀았다.
영세민 아파트 105동 1303호의 딸이었던 나는 나이가 비슷한 1310호의 딸과 1307호의 아들, 그리고 1302호의 딸과 친남매처럼 지냈다. 우리들은 가난한 부모를 둔 덕분에 학원이나 숙제 따위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이 오롯이 노는 것에만 집중하며 하루를 다 쓸 수 있었다.
우리는 해가 머리 꼭대기에 떴을 즈음 아파트 앞 놀이터에 모여 얼음땡 놀이를 하거나 삐거덕대는 그네를 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모래바닥에 비치는 그네 그림자가 어둠에 녹아 흐릿해질 녘이면 일을 마치고 돌아온 부모가 복도에서 고개를 빼고 저녁 먹으라며 우리 중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우리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선 항상 오줌 지린내가 심하게 났기 때문에 13층에 다다를 때까지 손바닥으로 코와 입을 막아야 했다. 손바닥에선 언제나 그네 줄의 시린 쇠 냄새와 텁텁하고 구수한 모래 냄새가 났다. 집으로 돌아간 우리는 각자의 집에서 배를 불린 뒤 복도에 모여 세일러문 놀이를 하며 배가 꺼질 때까지 놀았다.
언제까지나 놀이로만 꽉 찰 줄 알았던 나의 찬란한 시절이 한순간 암흑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13층 끝집에 승수 네가 이사 온 후부터였다. 승수는 나보다 한 살 어린 까무잡잡한 남자애였는데, 그 애는 내가 쓴 사시교정용 안경이 바보 같다는 이유로 나를 짓궂게 괴롭혔다. 친남매 같았던 13층 애들도 덩달아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곱게 땋아준 머리카락을 있는 힘껏 쥐어 잡아당긴다거나 내 사시 교정용 안경을 억지로 벗겨 숨기는 식이었는데, 그중 제일 견디기 어려웠던 괴롭힘은 그들이 내 사시를 놀리는 노래를 부를 때였다.
‘얼레리 꼴레리 강이슬 눈은 짝짝이 눈이래요’
내 치부에 음까지 붙인 놀림 노래는 언제고 내가 그들 눈에 띌 때마다 튀어나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서럽게 울며 가장 먼저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아빠가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로 울며 집에 돌아오는 내 모습을 열몇 번째 보았던 날, 안경에 긁힌 상처 위로 흐르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아빠는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빠는 다음 날 연차를 냈다. 여름휴가 기간에도 돈 번다며 회사에 나갔던 아빠였다. 아빠는 출근하지 않는 꿀 같은 평일을 소심한 울보 딸의 정신수련에 올인했다.
정신 수련의 첫 번째 챕터는 자존감 쌓기였다. 아빠는 놀림거리였던 내 눈을 칭찬해주기 시작했다.
“우리 딸 눈이 얼마나 크고 예쁜데. 두 쪽 다 이쁘게 까풀어져서 속눈썹도 길고”
“아니야! 눈동자가 짝짝이란 말이야”
“그런 걸 놀리는 놈들이 바보 같은 거야. 너도 같이 따져버려. 울지 말고”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같이 따지란 말인가. 어쨌든 저들의 눈은 짝짝이가 아닌데.
아빠가 어떤 말을 해도 도저히 내 눈을 사랑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서럽게 울어버렸다. 아빠가 야심 차게 준비했던 정신수련의 챕터 원이 허무하게 수포로 돌아갔다.
챕터 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아빠는 말했다.
“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 알아?”
“눈에는 눈이 달리고 이빨에는 이빨이 달렸다는 말이야?”
“비슷하긴 한데, 똑같이 되갚아주라는 말이야. 너를 놀리면 너도 걔네의 약점을 잡아서 놀려!”
나는 아빠 말을 듣고 눈을 흘기며 따졌다.
“아빠는 내가 걔들이랑 똑같이 나쁜 놈이 됐으면 좋겠어? 그러다 나 지옥 가면 어떡해!”
야무진 내 반박에 챕터 투도 실패했다. 아빠가 조금 생각하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딸, 딸이 아빠 닮아서 힘센 거 알지?”
챕터 쓰리의 시작이었다.
“13층 아빠들 중에 아빠가 제일 힘이 세. 그거 알지?”
무릎 위에 놓인 아빠의 팔에 힘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아빠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나는 혹해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13층 아들 딸 중에 누가 제일 힘이 세겠어?”
“나...?”
의심이 잔뜩 묻어난 자신 없는 내 대답을 듣고 아빠가 재빨리 엎드리더니 팔씨름을 제안했다. 나도 얼떨결에 아빠 앞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아빠가 두 손가락으로 내 팔목을 걸어 쥐고 시작을 외쳤다. 나는 얼굴이 터지도록 팔목에 힘을 주었다. 아빠의 손가락이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았다. 이만 포기할까 싶어 아빠의 얼굴을 봤는데 아빠가 힘을 주느라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좀 승산이 있는 게임 같았다. 나는 기합소리를 내며 몇 년 전 빨았던 젖 먹던 힘까지 보태 다시 한번 팔목에 힘을 주었다.
“얍!”
아빠가 윽 소리를 내며 옆으로 뒹굴었다. 끙끙대던 아빠가 겨우 몸을 추스르더니 너덜거리는 팔을 붙잡으며 내 힘이 제법이라고 칭찬했다. 여전히 인상을 쓴 채였다. 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아빠를 보니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센 남자를 이겼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샘솟았다.
“딸, 승수 고 자식이랑 너랑 둘 중에 누가 더 키 커?”
이번엔 자신 있게 나라고 대답했다.
“승수는 너보다 어리지?”
“응!”
“그럼 고 어리고 쪼끄만 놈이 또 놀리면서 까불면 주먹으로 한 대 때려버려!”
“때리라고..?”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이 없었다. 아빠는 손바닥을 쫙 펼치더니 손바닥이 승수의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때려보라고 말했다. 나는 주먹으로 아빠의 손바닥을 몇 대 쳤다. 가만히 내 주먹을 상대해 주던 아빠가 뭔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나 또한 이런 식으로는 승수를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가 꺾였다. 아빠가 주먹을 쥐어보라고 말했다. 나는 최대한 단단해 보이도록 힘주어 주먹을 감아 쥐었다. 내 주먹을 보고선 아빠가 말했다.
“딸, 이런 주먹은 가위바위보 할 때나 쥐는 주먹이야. 주먹질할 때는 이렇게 쥐면 안 돼”
아빠는 내 주먹을 가운데 손가락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모양으로 고쳐주었다.
“이렇게 뾰족하게 튀어나온 쪽으로 인중을 세게 때려버려!”
“인중이 어딘데?”
“여기!”
아빠가 자신의 코 밑을 가리켰다.
“왜 인중을 때려?”
“딸 주먹이 꽤 센 편이라서 코를 때리면 뼈가 부서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살짝 혼만 내주자!”
나는 가운데 손가락이 튀어나온 내 주먹을 바라보았다. 뭐라도 부실 수 있을 것처럼 강해 보였다. 아빠가 손바닥을 다시 펼치더니 이번에는 승수의 눈, 코, 입의 자리를 정해주었다.
나는 인중이 있을 법한 위치에 뾰족한 주먹을 몇 대 꽂아 넣었다. 아빠가 아픈 표정을 지으며 손을 털었다.
“장난 아닌데?!”
내가 신이 나서 웃었다.
“딸, 주먹으로 한 대 때리고는 이렇게 말해! (주먹을 들어 보이며) 한 방? (승수를 가리키며) 끝나!”
아빠를 따라 해 보았다.
“(주먹을 들어 보이며) 한 방? (승수를 가리키며) 끝나!”
기가 막히게 멋진 멘트였다. 마침 복도에서 13층 애들이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렸다. 승수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나는 아빠의 눈을 쳐다보았다.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도 좋다는 뜻이었다. 나는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복도에선 13층 애들이 뛰어다니며 세일러문 놀이를 하는 중이었다. 속으로 ‘정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주마’ 하고 생각했다. 복도 끝에서 악당 역할에 열을 올리고 있던 승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주먹을 뾰족하게 고쳐 쥔 채로 승수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승수가 나를 보더니 짝짝이 눈이 나타났다며 손가락질했다. 승수의 코앞까지 다가갔을 때, 난데없이 바람이 불었다. 삐져나온 잔머리가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천천히 살랑였고, 복도 난간에 앉아있던 남색 비둘기들이 푸드덕 거리며 느린 몸짓으로 허공에 몸을 던졌다. 뾰족하게 쥔 내 주먹이 느리고 안정적으로 허공을 갈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승수가 코를 움켜쥐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바닥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10호와 7호와 2호의 아들딸들은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얼어붙어있었다.
‘내가 정말 얘를 때렸구나!’ 내가 저지른 일에 누구보다 크게 놀라 집을 향해 달렸다. 작은 죄책감과 커다란 통쾌함 때문에 가슴이 웅성거렸다. 우리 집 현관문의 차가운 문고리를 잡았을 때 퍼뜩 아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는 몸을 돌려 승수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승수는 여전히 얼빠진 상태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배에 힘을 주고 승수를 향해 악을 썼다.
“(주먹을 들어 보이며) 한 방?! (승수를 가리키며) 끝나!!!”
할 일을 끝까지 마친 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현관문을 닫았다. 문밖에서 승수가 크게 우는 소리가 났다. 가슴이 발랑거렸다.
아빠랑 승리를 자축하며 된장국에 밥을 말아먹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승수네 엄마가 승수의 손을 잡고 서있었다. 승수는 조그마한 콧구멍에는 다소 버거워보이는 큼지막한 휴지뭉치를 쑤셔 넣은 채로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서있었다. 아빠가 뒷목을 긁적이며 승수 아줌마께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소리를 된장국을 퍼 먹으며 들었다. 식탁 밑으로 주먹을 뾰족하게 쥐어보았다. 어째서인지 좀처럼 힘을 주어 단단히 감아쥘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