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이슬 Sep 06. 2018

소개팅에서 대참패하는 방법

우리는 ‘시발 이게 뭐야’라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지속, 반복적으로 받아온 칭찬과 그로 인해 쌓인 자기애는 언젠가 한 번은 독이 돼 뒤통수를 후린다. 공식적인 연구결과가 있는지는 모르겠고,

나를 표본으로 한 임상연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임으로 나는 이것을 진실이라고 믿겠다.

     

나는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완전 타칭 분위기 메이커였다.

내가 있는 곳엔 늘 사람이 많았고, 나는 언제든지 그들을 즐겁게 해 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나는 낯가림의 뜻을 몰랐다.

그러니까.. 알긴 아는데 황소개구리 즙이나 푸아그라처럼 알지만 모르는 단어랄까.

낯을 가리긴 왜 가리나, 낯이고 뭐고 가릴 시간 없이 바로 재치 발사인 거다.      


밝고, 쾌활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성격 덕을 정말 많이 보며 살았다.

굵직한 것들 몇 개를 꼽아보자면, 고등학교 재학 시절엔 2년 연속 전교회장 감투를 썼다.

반마다 돌아다니며 이상한 춤을 용감하고 뻔뻔하게 춰댔더니

학업에 지쳐 있던 학우님들이 꽤 진심으로 웃으며 뽑아줬다.

대학 재학기간과 취업 준비기간 통틀어 면접을 본 건 딱 세 번뿐이다.

더 많은 면접을 볼 기회가 없었다. 이 놈의 면접은 보기만 하면 합격이니까.

나는 200:1의 경쟁률을 자랑하던 면접장에 재치와 밝음만을 들고 입장했고 합격했다.     


나는 내 성격과 센스와 재치를 사랑했고 주변인들은 그런 나를 아낌없이 지지하며 칭찬했다.

안 그래도 밝은 나의 성격은 지인들의 칭찬을 있는 대로 다 받아먹으며 빵빵하게 살이 쪄갔다.     


넘치는 자기애를 만끽하던 중 생전 처음으로 소개팅을 하게 됐다.

나의 첫 소개팅 상대는 내가 반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80 후반의 큰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가슴!


그와 나는 지하철 역 앞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뒤 그가 예약했다는 파스타 집에 갔다.      

그 날 내가 파스타를 진짜 단 한 가닥도 코로 먹지 않았는지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      


나는 떨고 있었다.      


태어나 떨어본 일이 손에 꼽는 내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자

이번엔 진짜로 너무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파스타를 계속 먹었다.

그 남자가 하는 말을 듣는 척하며 아무것도 듣지 않고 있었다.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파스타를 먹거나, 얘기를 듣거나, 숨을 쉬거나, 눈을 깜빡이거나 그중에 딱 하나만 하고 싶었다.   

  

그래도 내가 그 모든 것들을 무사히 하긴 했는지 남자는 밝은 얼굴로 2차를 제안했다.

파스타 집을 나와서 시원한 공기를 가르며 걸으니

머릿속이 차분해지고 막혔던 가슴이 뚫리면서 뭔지는 몰라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게다가 술도 한 잔 곁들이는 자리라면. 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확실히 자신 있었다.      


그때부터 그 남자는 더 이상 소개팅 상대가 아니었다.

정복의 대상이었다. 청중이었고 관객이었고 나의 백전백승 쾌활함에 반하고야 말 잠재적 팬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술집에 입장해서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남자는 나에게 술 잘 마시느냐고 물었다. 나는 술을 잘 못 한다고 했다.

반전을 위한 거짓말이었다.

내 주량은 소주 세 병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소주병을 집어 들고 파워풀한 스냅으로 회오리를 만들었다.

남자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속으로 ‘어때 쩔지?’라고 으스대며

얼른 맥주병을 집어 수저로 병뚜껑을 따는, 일명 ‘뻥따’를 했다.

그 ‘뻥’ 소리를 신호탄으로 삼아 나는 고삐를 풀었다.     


“잔 수거, 잔 수거”

나는 한껏 흥이 나서 남자의 잔이 비워질 때마다 나의 앞으로 끌어와 대단한 비율로 소맥을 말아댔다.

술이 들어가니 입이 풀렸다.  한참을 정신없이 말하다가 이 남자를 봤는데 표정이..

표정이..... 뭔가 대단히 잘못됐음을 느낄 수밖에 없는 표정..     


아차 싶었다. 아. 여기는 회식자리가 아니지. 내 앞의 남자는 부장님이 아니구나...

그때서야 부장님의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남자의 큰 키와 탄탄한 가슴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만회해야겠다고, 만회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언뜻 본 소개팅 백전백승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상대를 칭찬하라’

나는 곧바로 글로 배운 소개팅의 위험성을 몸소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런데...’라고 운을 띄웠다.

 남자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나에게 눈을 맞췄다.

나는 남자의 눈을 보며 ‘가슴 근육이 참 멋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남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나는 뻘쭘해서 쌍 엄지도 들어 보였다.

남자는 실제로 맥주를 약간 뿜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의 ‘말로 말 가리기’가 시작되었다.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으니 다른 말을 괜히 더 덧붙이는.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말로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최악의 수.     


나는 남자에게 가슴이 멋지다는 얘기가 성희롱이 아닌 칭찬이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내 지인들을 능욕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진짜 친한 오빠들은 운동을 안 해서 가슴이 엄청 크거든요!

큰 건 상관없지만 대부분 되게 처져서.. 완전 젖....’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남자와 나는 통했다.  정확히 같은 생각을 했고 서로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시발 이게 뭐야’라고 생각했다.     


누가 동화 속 빨간 구두를 내 혀에 달아놓기라도 한 것처럼 나의 혀는 통제를 잃고 나대기 시작했고,

내가 싸놓은 똥 같은 말들은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져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아, 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수년간 차곡차곡 가슴 한쪽에 쌓아왔던 말빨에 대한 검은 자만들이 독이 되어 나를 잡아먹는 것일까.     

 

당황스러운 얼굴로 말을 한 톤이나 내뱉던 나를, 나보다 더 당혹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던 남자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톤으로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집에 가자고 했다.


금요일 저녁 8시였다.


나는 조용히 코트를 입고 가방을 챙겼다.     

밖으로 나와서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 시간은 잔인하리만치 길게 느껴졌다.

아니 실제로 길었다. 15분 정도를 걸었던 것 같다.

길거리 상점 쇼윈도에 비치는 우리의 모습을 곁눈질로 쳐다보며 걸었다.

남자는 정말 키가 컸다.      


걷고 걷다 보니 어느새 지하철역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야 했고 남자는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야 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남자는 계단을 내려갔다.

남자가 계단을 내려가는 걸 조금 바라보다 뒤돌아 걷는데 카톡이 왔다. 남자였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카톡을 받고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남자가 보였다.

헤어진 지 1분도 안 돼서 다시 마무리 카톡을 보낸 그의 마음을 짐작하려니 굉장히 쓸쓸해졌다.


그나저나 좋은 하루를 보내라니. 아깐 많이 늦었다고 집에 가자더니!      













매거진의 이전글 아빠 없는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