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개가 산채로 토치에 그을려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와 개의 비명 소리로 동네가 시끄러웠다. 높이 들린 몽둥이에 머리를 맞은 개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개를 잡던 남자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펴고 땀을 닦았다. 긴장감에 팽팽했던 공기가 느슨해진 사이, 죽은 줄 알았던 큰 개가 비치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개는 이내 무거운 쇠줄을 질질 끌면서 그을리고 부서진 몸으로 비틀대나마 죽을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이 비명을 지르며 개를 피해 흩어졌다. 혼비백산한 틈에 개의 주인이 뛰쳐나와 이름을 불렀다. 큰 개가 멈추어 주인을 바라보자 남자는 쪼그려 앉아 다정한 목소리로 개를 달랬다.
“쭈쭈쭈쭛 괜찮아. 이리 와.”
큰 개는 가랑이 사이로 바짝 말았던 꼬리를 낮게 세워 흔들며 주인에게 다가가더니 천천히 배를 까고 누웠다. 주인이 옳지 착하다 하며 쓰다듬는 척 개목에 메인 쇠줄을 낚아챘다. 개를 향한 토치질과 몽둥이질이 다시 시작되었다. 소름끼치는 소음 사이로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여튼 쟈는 멍청하당게”
나는 멍청한 개가 불쌍해서 큰소리로 울었다. 우는 나에게 누군가 말했다.
“저걸 먹어야 건강해진 몸으로 이 여름을 무탈하게 잘 날 수 있는 거여”
이것은 복날이 되면 생생해지는 아주 어릴 적 시골에서 본 개 잡는 장면이다. 이번 말복에도 어김없이 떠오른 기억에 나는 인간으로서 아주 미안하고 무색하고 죄스럽다.
올해의 복날은 특별하다. 더 이상 육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성 재료 대신 제철 채소로 맛있고 정성스러운 음식을 차려 먹는다. 오늘은 면역력 증진에 좋은 여름 가지 요리로 보신을 할 것이다. 그것을 먹고 이 여름을 무탈하게 잘 나볼 것이다.
채식의 삶은 저녁으로 제육볶음을 먹은 어느 날 시작되었다, 나른한 기분으로 반려견의 따뜻한 배를 도닥여 주던 중, 방금 전 먹은 ‘고기’ 또한 한 때 살아 숨 쉬던 동물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즐겨 먹던 음식에 ‘동물’을 붙여 불러 보았다. 동물 탕, 동물구이, 동물 숙회, 동물무침. 끔찍하고 경악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이 그동안 내가 먹어왔던 것들의 진실이었다.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신했던 나는 ‘삼겹살은 사랑이다.’, ‘치느님’, ‘발골’ 등의 오싹한 농담을 잘도 하며 죄책감 없이 동물을 먹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의 모순을 직시하자 슬프고 부끄러웠다. 그 날부터 동물이 들어간 음식을 먹지 않는다.
오늘은 광복절이다. 그리고 말복이다. 빛을 되찾은 해방의 기쁨과 암흑에서 해방되지 못한 존재들의 죽음이 한 날짜에 포개져있다. 비대해진 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다리뼈가 부러진 닭들과. 답답한 철장을 이가 바수어지도록 씹었던 돼지들과, 인간에 의해 새끼와 생이별을 당했던 소들. 동족의 비명을 들으며 공포에 떨던 개들이 죽을 것이다. 지옥 같은 삶을 살던 동물들은 죽어서 인간의 밥상에 오를 것이다. 가슴이 내려앉는다.
‘고기’ 없는 식탁이 더 특별해진 요즘. 복날 하루만이라도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은 어떨까. 되찾은 빛을 기념하는 뜻 깊은 날. 다른 생명의 빛을 꺼뜨리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자유를 억압하는 일에 숟가락을 얹지 않는다면 우리의 하루는 훨씬 멋지게 빛날 것이다.
이 글은 [한국일보 2030 세상보기] 8월 14일자로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