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울어도 돼

by 수리

4주간의 Human Essence 수업이 막을 내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연기 수업이 시작됐다. 로빈은 들어가기에 앞서 연기를 할 때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하는 부분들에 대해 짚고 넘어갔다. 쉽게 기억할 수 있게끔 그는 ‘CAR BOMB’이라는 단어를 예로 들었다. 연기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다음과 같았다.


Conflict

Action

Reaction

Believe in the character

Objective

Motivation

Believe in a situation


역할과의 충돌이 있어야 하고, 그에 맞는 행동과 반응이 필요하며, 그 캐릭터를 진심으로 믿고 몰입해야 한다는 것. 주제와 행동의 이유가 명확해야 하고, 연기를 위한 동기도 있어야 하며, 그 상황을 진심으로 믿어야 하는 것이 중요했다.


연습실 거울에 마커로 그는 ‘CAR BOMB’을 써두었다. 앞으로 우리가 연기를 하면서 늘 마음에 두고 고민해야 할 7가지 요소였다.


오늘은 그 중 첫 번째인 Conflict, 갈등에 대해 다뤘다. 우리는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갈등을 마주치는가. 나만 해도 지난주 출장에서 엄청난 경계에 부딪혔다. 같이 간 컨설턴트가 나에게 너무 많은 일을 떠넘긴 게 문제가 됐다. 줄곧 어린 내가 참아왔지만, 그날은 결국 터져버려 조금 다투게 되었다. 물론 결국 화해했고, 그도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앞으로 더 서포트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불편한 감정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런 소소한 conflict는 늘 존재한다. 꼭 누군가와 함께 있지 않더라도, 내 마음속에서도 갈등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정말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지나가는 하루가 얼마나 될까? 나에게 그런 하루는 더더욱 쉽지 않은 것 같다. 그저 감정 상하는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가면, 그걸로도 정말 만족스러운데, 그게 참 쉽지 않다.


안타깝게도, 갈등은 살아가는 내내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인 듯 하다. 정말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산다고 가정하더라도, 결국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갈등하게 되지 않을까. 앞서 다뤘던 사랑, 자존감, 행복 같은 감정들도 어쩌면 우리가 연속되는 갈등 속에서 살아가기에 더더욱 찬란하게 느껴지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서른을 넘어서면서 내가 나 자신에게 안타깝게 느꼈던 것 중 하나는, 나는 늘 갈등에서 비롯된 감정들을 애써 없애려 했다는 점이다. 부모님은 항상, 뭐든 좋게 끝내라고 말씀하셨다. 혹여 서로 감정이 상하더라도, 마무리는 좋게 하라고. 그 가르침은 정말 이상적이었지만, 자라면서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갈등은 항상 있었고 모든 관계를 좋게 끝낸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나는 좀 늦게 배웠다. 하지만 “좋게 생각해라”, “네가 이해해라”, “그걸 품어야 큰 사람이 되는 거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온 나는, 화가 나거나 실망하거나 속상한 감정이 올라올 때면 그 감정들이 나서지 못하게끔 노력했고, 어느새 그런 태도는 자존감과도 연결됐다. 난 왜 저들을 품지 못하지? 왜 이런 일에 화를 내는 거지? 나는 도대체 왜 그런거야? 하며 자책하게 되었다. 그것은 날 자꾸 작게 만들었다.


내가 그 '화남'도, '속상함'도, '짜증남'도 다 나의 소중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된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작년, 번아웃으로 한 동안 고생을 하다가 심리상담을 받게되었고, 선생님으로부터 자라오며 감정적 수용이 잘 이루어 지지 않았던거 같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이게 내가 연기를 시작하게 된 가장 큰 계기이기도 하다. 나는 그동안 '부정적이다'는 카테고리 안에 몇 가지의 내 감정들을 가둬 놓았었다. 하지만 그것들 역시도 나의 일부였고, 내 감정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나의 행동들과 생각들에 비로소 정당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그런 감정들을 조금씩 이제는 수용해보려는 힘이 생기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내 안에 억눌려 져있던 감정들을 탐험하고 싶었고, 그것의 방법이 어쩌면 연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이어진 것이다.


극에서도 conflict는 정말 중요하다. 갈등은 스토리의 핵심이다. 아무 사건도 없는 드라마를 누가 보고 싶어하겠는가. 로빈은 의자 하나를 가운데 두고 수업을 이어갔다. 두 명의 지원자를 받겠다고 했고, 오르와 가브리엘이 지원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 의자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다치지만 않게 몸싸움도 가능했고, 감정 교류도 충분히 하라고 했다. 액션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둘은 의자를 가지기 위해 다퉜다. 덩치가 큰 오르는 의자를 뺏으려 했고, 가브리엘은 의자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며 버텼다. 둘의 다툼이 조금 약하게 느껴졌는지, 로빈은 더 강한 다툼을 요구했다.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과 다투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즉흥연기가 끝난 후, 로빈은 또 다른 상황을 주었다. 로즈에게는 지금 죽기 직전인 엄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라는 지령이 주어졌고, 바니에게는 아픈 자식을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하니 로즈에게 차를 빌려달라고 요구하는 상황이 주어졌다. 서로의 상황은 모른 채 연기를 시작했다. 눈치 빠른 로즈는 앉자마자, “나 편지 못 쓰게 말릴 거죠?”라며 까불었다. 액션이 시작되자 둘은 서로의 요구를 끊임없이 밀어붙였다. 감정에 완전히 몰입한 바니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하지만 로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편지에 집중했다. 둘은 평소에 친해서 수업 전에 같이 운동도 다녀왔다고 했는데, 극에서는 완전히 상극이 되었다.


나도 슬슬 긴장되기 시작했다. 나는 과연 어떤역할을 주려나.

로즈와 바니의 연기가 끝난 뒤, 로빈이 나를 밖으로 불러내 역할을 설명해줬다. 내 역할은 생일날, 남자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해야 하는 미션을 받았다. 로빈은 나에게,


“헤어져 본 적 있지?”

“당연하죠. 듣기만 해도 마음 아프네요.”

“연기는 감정으로 하면 안 돼. 캐릭터로 해야 돼. 너 감정을 쓰는 게 아니야.”

라고 로빈은 말했다.


솔직히 아직 이해는 어려웠지만, 알겠다고 하고 무대로 들어갔다. 내 상대역은 방금전까지만 해도 의자로 싸우고 있던 오르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오르가 문을 두드렸고, 나는 “들어와”라고 했다. 그는 내 생일을 축하하며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자기야, 오늘 생일이잖아!”

“어.. 그렇지.”

“내가 뭘 준비했는 줄 알아?”

“뭔데?”

“짜잔! 선물~”


속으로는 ‘하... 나 완전 쓰레기 되겠구나’ 싶었다. 저 천진난만한 얼굴 앞에서 이별을 말해야 하다니.


“어.. 고마워. 근데 오르, 나 할 말 있어. 우리 헤어지자.”


예상치 못하게 오르는 곧장 화를 냈다.

“몇 번째야? 또 이 소리야? 왜, 또 뭐가 문제야?”


그러게 뭐가 문젤까... 솔직히 무슨말을 해야하나 몰라서 그냥 아무말이나 뱉었다.


“그래. 그게 문제야. 내가 이 말을 몇 번이나 하게 만들어! 지긋지긋해.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아.”


오르는 슬퍼졌다.


“내가 잘할게. 다시 잘해보자. 진짜야.”


너무 가슴 아팠지만, 내 미션은 '생일에 헤어진다'는 것이었다.


“됐어. 난 이런 거 필요 없어.”


난 그가 건넨 반지 상자 같은 걸 바닥에 던졌고, 울먹이며 주우러 갔다. 몇 번이나 나를 붙잡고 화를 내다가도, 또 매달렸다. 어느새 무릎까지 꿇고 있었다.


“아니, 제발... 나 너 없으면 못 살아. 안 된다고...”


속으로는 ‘제발 무릎 꿇지 마...’ 싶었지만, 입으로는,


“아냐. 우린 이미 끝났어. 넌 한국으로 가야 하고, 난 여기 남아. 우린 안 돼.”


즉흥이다보니, 실제로 나와 남편을 늘 힘들게 했던 문제들이 튀어나와버렸다. 우리는 그 이유로 헤어짐을 고려한 적은 없지만, 늘 고민이 되는 현실이었기에 무의식적으로 나왔던 것 같다. 오르는 끝까지 나를 붙잡았고, 나는 그를 뿌리치고 문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씬이 끝났다. 끝나자마자,


“미안해!!!! 오르 ㅠㅠㅠㅠㅠ”


라고 외쳤다. 오르는 하하 웃었다.


한 타임 쉬는 시간을 가진 뒤, 로빈은 우리를 짝지어 주며 또 하나의 즉흥 상황을 만들게 했다. 이번에도 확실한 목적(Objective)을 갖고, 상대와 갈등하는 씬을 만들어보라고 했다. 나는 이번에도 슈안과 짝이 되었다. 우리가 만든 설정은 이랬다. 나는 언니고, 슈안은 여동생. 슈안은 나를 클럽에 데려가려 하고, 나는 집에 있고 싶은 사람. 아무래도 앞선 씬에서 오르랑 헤어진 설정이 있었기에, 그 직후로 연결하면 더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헤어진 충격으로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로 설정했다.


나는 소파에 멍하니 누워 폰만 보고 있었고, 슈안은 내게 와서 말했다.


“언니! 걸스나잇이래~ 오늘 파티한대! 같이 가자~”
“됐어... 나 집에 있을래. 나가기 싫어.”
“왜에~”
“됐어. 집이 좋아.”
“언제까지 폰만 보고 있을 건데!”
"어딘데...?”
“XX 클럽.”
“거기... 오르랑 몇 달 전에 갔던 데야.”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아니 언니, 언제까지 오르 얘기할 거야!”

슈안은 내 폰을 확 뺏더니,


“뭐야, 오르 인스타그램 보고 있었어?”
“아니, 그냥... 얼마 전에 새 포스팅 올라왔더라고…”

“정신 좀 차려, 언니! 언니가 헤어지자고 했잖아!”
"그랬지...”


또 한 번 사람들의 웃음이 빵 터졌다.

“나 진짜 간다?! 혼자 간다?”
“가! 그래 가!!”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슈안은 정말 혼자 나가버렸다. 내 폰을 들고.
나는 “야 폰 내놔!” 하며 슈안을 따라가면서 씬이 끝났다.


로빈은, 코미디가 사실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장르 중 하나인데, 너무 재밌게 잘 봤다고 칭찬해줬다. 나도 하면서 웃음 참기가 힘들었지만 정말 재밌었다. 즉흥 연기의 매력은 아마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들 덕분에 훨씬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배우들이 대본이 있으면서도 애드리브를 넣는 이유를 알겠달까. 그게 오히려 더 괜찮은 결과를 불러오는구나 싶었다.


나와 슈안의 상황은 비교적 가벼운 주제였지만, 다른 팀들은 훨씬 더 무거운 주제를 다루기도 했다. 엄마와 아들의 갈등, 혹은 연인 사이의 갈등처럼 진지한 주제들이 있었고, 그 안에서는 여러 감정들이 깊이 오갔다. 그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 감정들을 힘들어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Human Essence를 통해 주로 사랑, 자존감, 희망 같은 밝고 긍정적인 감정들을 들여다보아 왔다. 그러다가 이번엔 그와 반대되는 감정들, 즉 갈등과 상처, 거절과 이별 같은 어두운 감정들을 다루게 되니 그 낯선 무게감에 지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로빈 역시, 내가 오르와의 이별 연기를 마친 후 괜찮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봐 주었었다. 누군가에게 헤어지자고 말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진 말을 내뱉는 건 그 자체로 감정적으로 힘들 수 있으니까. 다행히 나는 괜찮았다. 다행히 나에게 그 순간은 연기일 뿐이었고, 나는 비교적 빨리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수업 마지막, 다 함께 모여 오늘 느낀 점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아야는 이미 좀 울고 교실을 나갔고, 다른 사람들도 눈에 띄게 다운된 상태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감정을 다루는 연기자라는 직업도 정말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


다운 된 사람들과 달리, 나에게 이번 수업은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감정들 짜증, 분노, 실망, 눈물 그 모든 것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오늘의 수업이 내게 다시금 상기시켜줬다. 누군가에게서 싫은 소리를 들으면 당연히 화가 나고, 하기 싫은 일을 하라고 자꾸 보채면 짜증이 나고, 사랑하는 사람이 실망감을 안겨주면 속상하고, 그 사람이 미워지기도 하는 그런 감정들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당연함을 인정하게 되면,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 사람인지 조금씩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세대는 대체로 울지 마, 그만 울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던 것 같다. 감정을 드러내는 건 약한 거라고, 참는 게 어른스러운 거라고 배워 와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울어도 된다는 걸 안다. 크고 작은 갈등이 몰아치는 한 생애 속에서, 어떤 감정을 가지든, 나는 그저 나라는 존재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음을 되새겨봤다. 그리고 감춰뒀던, 불쌍하게도 '부정적'으로 치부됐던 나의 감정들을 절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갈등의 씬은 무한 반복되지 않는다. 그 순간의 시간이 지나가면, 우리는 또 다른 다채로운 상황과 감정을 마주하게 될 거다. 그때는 또 그때의 감정으로, 그때의 시간을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각자의 영화를 살고 있는, 지구에 있는 모든 주인공들이 나를 잃지 않길 바래본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05화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