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Human Essence 수업의 마지막 날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인 연기 연습이 시작된다. 그동안 이어져 온 Human Essence 수업을 돌이켜보면, 참 유익한 시간이었음을 느낀다. 특히 '사랑'과 '자존감'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이 인상 깊었다. 확실히, 수업을 시작하기 전보다 내 감정은 더 몽글몽글 해졌다.
마지막 주제는 ‘행복’ 이었다.
행복했던 순간의 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고, 또 다른 누군가는 크고 뚜렷한 행복을 좇는다. 나에게 한때는, 행복이라는 감정 자체가 회의적으로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20대 내내 꿈을 향해 무작정 달리던 사람이었다. 개발협력이라는 분야에 매력을 느꼈고, 세상의 불평등과 문제에 맞서겠다는 각오로 커리어를 쌓아가던 시기였다. 지금은 유엔 직원으로 전 세계를 오가며 출장과 회의를 다니는 내 모습이 누군가에겐 멋져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40도의 몽골 겨울을 인턴 신분으로 버텼고, 영상 40도의 더위 속에서 월 720불을 받으며 발룬티어로 일했던 시간도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다시는 못할 거 같은 순간들이지만, 그때는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고, 그만큼 감수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몽골로 향하기 전 스스로 다짐했다. "인생에서 행복을 쫓는 게 과연 그렇게 중요한 걸까? 나는 그냥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그것이 당시의 나를 지탱해준 정신 무장이었다. 아버지가 위독할 때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을 설득하던 말이기도 했다. 죽기 전 아버지가 내게 남긴 말처럼, 나는 그냥, 내가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그 시절의 나에게 행복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그곳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 낯선 환경 속에서의 적응, 그리고 유엔 기구에서 일하며 느낀 성취감은 분명 행복이라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내 인생의 목표나 추구는 행복이 아니었다. 오히려 ‘행복 추구’라는 말이나 ‘소확행’이라는 표현이 가볍고 가소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나 자신의 행복보다는, 세상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찾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생각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영향이 컸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늘 내게 말씀하셨다.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라.” 그렇게 나는 내 행복을, 더 가난한 사람들과 더 배고픈 사람들을 돕는 세상의 보탬 속에 밀어넣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달려오다, 결국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그 모든 생각들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는 걸, 장거리 달리기는 초반부터 전력질주하면 끝까지 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내게 계속 달려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스물아홉. 석사 공부를 마칠 때 즈음 운 좋게 오퍼를 받아, 식량기구 로마 본부에서 컨설턴트로 일하게 되었다. 드디어 돈도 꽤 벌었고, 유럽의 워라밸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도 함께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만 보였던 그 시기, 어느 날 퇴근 후 남편과 로마 트라스테베레의 한 어두운 와인 바에 앉아 이런 말을 꺼냈다.
“나... 근데, 행복하지 않아. 나는 내가 행복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
그 순간, 남편은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에겐 행복할 이유도 없었다.
내가 쫓아오던 것들이 생각보다 허무하게 느껴졌고, 하나를 이루면 또 다른 것을 향해 달려야만 한다는 사실이 벅찼다. '이렇게 계속 달리기만 해도 괜찮은 걸까?' 무엇보다도, 행복이라는 걸 도대체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치열한 대한민국의 교육과 사회 안에서, 인정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분위기 속에서 자란 나에게 어린 시절부터 내게 남은 건 '달리는 법'뿐이었다. 무언가를 성취해야만 나는 비로소, '행복한 것처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20대는 그래도 괜찮았다. 나를 몰아세우고 채찍질할 에너지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아직은 꽤나 밋밋했던 도화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려가는 일이 짜릿했다. 성취의 기쁨에 취해 나는 더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곧 맞이할, 조금은 영글어버린 30대는 그렇지 않을 것이었나 보다. 스물아홉의 나는 그렇게 인생의 여러 부분과 생각들을 하나둘 건드리기 시작했다. 전력질주하던 내게 처음으로 브레이크가 걸렸고, 추구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행복이라는 감정도 다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방황의 시간들은, 나름 고통스러웠다.
로빈은 저번처럼 명상을 시켰다. 누운 채로 최근부터 아주 오래전 과거까지, 행복했던 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는 시간이었다. 최근에 행복했던 기억이라면 직장에서 무언가를 칭찬받았을 때, 연기 수업을 마치고 바이크를 타고 돌아가던 순간 같은 것들이 스쳤다. 그러고 20대의 내 행복은 온통 커리어와 내가 성취한 모든 것들 이었다. 점차 5년 전, 10년 전,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10대의 나는 친구들과 보낸 학창시절의 에피소드들이 떠올랐다. 나뭇잎만 떨어져도 웃는다던 그 시절, 친구들은 내게 전부였다.
더 어린 시절로 넘어가서는 그렇게 갖고 싶던 인라인스케이트를 아빠가 사주던 날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날, 아파트 앞에서 동생과 함께 인라인스케이트를 탔던 기억도. 우리는 계속 넘어졌고, 아빠는 바지 속에 엉덩이를 보호해 줄 수건을 채워주셨다. 그 덕분에 넘어져도 아프지 않았고, 오히려 두툼한 수건이 만들어 낸 큰 엉덩이 모양이 웃겨서 동생과 깔깔대며 한참 웃었다. 서로를 놀려대던 그 장면이 떠올랐다.
더 오랜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말도 잘 못하던 두세 살 즈음, 가족과 함께 처음 갔던 놀이공원이 떠올랐다. 아마 인생 첫 놀이공원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내게 팝콘을 쥐어주셨고, 그것이 나의 첫 팝콘이었다. 그 팝콘을 들고 찍은 사진도 기억난다. 그날 엄마가 내게 씌워준 베레모는 너무 쫄려서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지만, 말 못 하던 나는 그냥 얌전히 있었겠지. 신기하게도, 나는 그날이 기억난다. 남편은 가끔 나에게 어린 시절 기억을 이상하리만큼 잘한다고 말한다.
명상이 끝난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어린시절 행복의 장면들은 놀랍게도 모두, 무언가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순간에 있었던 감정들이었다. 가족과의 사랑스러운 시간들에서, 내가 처음 경험한 상황들 속에서 그저 피어오른 감정들이었던 것이다. 행복은 씨앗을 심어 생겨나는 결과물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심겨져 있는 씨앗에서 피어나는 감정이라는 것을. 어쩌면 나는 그 씨앗을 성취나 조건이란 단어로 덮어두고 잊고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로빈은 종이를 건네며 우리가 만들고 싶은 행복한 세상에 대해 써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도 적고 그걸 바탕으로 모놀로그를 만들어 보자고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모놀로그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는 내가 바꾸고 싶은 세상의 모습을 썼고,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면서 작은 연기를 곁들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초저출산 국가이자 OECD 자살률 1위라는 타이틀을 가진 병든 사회.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고, 짧은 시간 안에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지만, 그 이면에는 너무나 많은 부작용이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곳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성장’이라는 것이 과연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학창시절 성적과 입시에 지쳐 있던 내 모습과, 그 속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나의 이야기를 짧은 연기로 풀어냈다. 나는 모놀로그가 혼자서 하는 연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준비했다. 알고 보니 독백 연기라는 뜻이었다. 연기를 하기 전, 나는 꽤나 긴장됐다.
‘내가 남들 앞에서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감정을 끌어 올릴 수 있을까?’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었기에 떨렸지만,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컴포트 존을 부숴보자는 마음으로 도전했다. 무대에 올라가 내가 할 연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 감정을 잡았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시작과 동시에 울컥함이 올라왔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겪었던 일이었기에, 감정이 더 진하게 올라왔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첫 연기가 끝났다. 로빈과 친구들은 박수를 쳐주었고, 나는 박수소리와 함께 몰입에서 빠져나왔다.
로빈이 꽤 놀란 표정이었다. 나 자신도 놀랐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울먹일 수 있다는 것,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컴포트 존이 한 겹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도 친구들이 하나둘씩 무대에 올라 자신의 모놀로그를 보여줬고, 로빈은 각자에게 피드백을 주었다. 몇몇은 다음 시간에 다시 준비해 오라는 말도 들었다. 다행히 나는 통과...!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운다니 걱정이 많았는데, 나도 어쩌면 가능성이 있겠는걸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아직 내가 겪지 않은 상황에서의 몰입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갈길이 멀지만, 처음으로 꽤나 할만하고 재미있다는 걸 느꼈으니, 그것 만으로도 4주간의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성취감에서 느끼는 행복이 그 찰나 또 찾아왔다.
돌아오는 바이크 위에서 오늘도 나는 여러생각에 잠겼다.
개발도상국을 다니다 보면, 주변과의 비교 속에서 감사할 순간들을 수없이 마주하게 된다. 집밖을 나가 거리를 보면 맨발로 과일을 파는 아이들, 트럭 뒤에 수십명이 끼여 일을 갔다가 지친모습으로 퇴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생활함에 있어 감사함을 느낀다. 다만, 나도 사람인지라 일과 삶에 지쳐 감사하지 못하는 날도 분명 있었다. 그럴 땐 이 곳에서 나는 더 바보 같고, 작아지고, 부끄러웠다. 내가 그 곳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모습들이 내가 그들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난 왜 행복하지 않는가. 그 질문 앞에서 스스로를 자책하고, 때론 무력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문득 그런생각이 들었다. 과일을 팔고 있는 그 아이에게, 그날 하루가 정말 행복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트럭 뒷칸에 올라 몸을 실은 사람들에게, 일이 끝난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가는 그 길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내가 내 행복을 뒤로 미뤄가며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여기는 나의 동정과 자책에 대해, 오히려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저, 내가 설 수 있는 자리에서, 내가 바라는 세상을 조금씩 만들어 가면 됐을 뿐이었다.
스물아홉, 내가 방황했던 행복을 찾는 여정은 사실, 내 안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내면의 행복을 소중히 지키며, 다시 나의 길을 걸어가야보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