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로빈은 극의 흐름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는 애니메이션 영화 니모를 찾아서를 예시로 들며, 주인공이 험난한 여정을 거쳐 아빠와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을 통해 극에서의 클라이맥스와 메시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영화나 연극이든 결국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기 마련이라고 로빈은 말했다. 감독은 그 메시지를 극 속에 녹여내고,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의 흐름과 감정선을 따라가며 받아들이게 된다.
니모를 찾아서를 보면, 니모는 수많은 공격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알에서 태어난 물고기다. 그로 인해 니모의 아빠는 니모를 과하게 보호하며, 위험한 곳에는 절대 가지 못하게 막는다. 니모는 점점 그런 아빠의 과잉 보호에 불만을 느끼고, 반항하듯 배를 손으로 두드리다 결국 잠수부에게 잡혀가고 만다. 아빠는 니모를 되찾기 위해 깊은 바다로 여정을 떠나고, 그 여정은 상어를 비롯한 온갖 위험을 수반한다. 그렇게 수많은 시련을 거쳐 마침내 니모를 다시 만나게 된다. 이 영화에서 클라이맥스는 여러 장면이 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아빠가 니모를 찾는 여정 속에서 마주치는 위기의 순간들이 가장 극적인 절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보는 사람의 연령대나 입장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자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조금은 놓아줄 필요가 있다’는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디즈니는 후에 Let it go라는 노래로 대박을 친다. 그들의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어쩌면 여러 영화들이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오늘 팀별로 극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 전에 로빈은 우리가 담고자 하는 메시지를 먼저 정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종이를 나눠주며 자신이 인생을 살면서 깨달은 중요한 것 세 가지를 각자 적어보라고 했다.
서른둘. 인생을 아직 많이 살았다고 할 순 없지만, 3분의 1쯤 살아온 시점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첫 번째, 왠만하면 누구에게나 (겉으로라도) 친절한게 낫다.
졸업 이후 나는 여러 나라에서 근무해왔다. 몽골 사무소에서 인턴으로 시작해, 동티모르, 로마, 한국을 거쳐 지금은 방콕에서 일하고 있다. 몽골로 떠나오며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본 눈 덮인 사막을 보며 지구가 참 넓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그 생각이 바뀌었다. 생각보다 지구는 가끔 좁았다. 동티모르에서 함께 근무했던 분을 로마에서 다시 만나고, 몽골에서 일했던 동료를 방콕에서 또 만나기도 했다. 헤어짐의 순간에서는 매번 ‘이 사람들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면 아쉬워 했지만, 이젠 그리 아쉬워하지 않게 되었다. 생각보다 지구를 돌아다니며 예전의 인연을 다시 만나게 되는 순간들이 잦았다. 얼마 전에도 방콕으로 부임한 분과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동티모르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의 언니의 친구였다. 또 어제는 본부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가 방콕에 놀러 왔다기에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는데, 그녀가 데려온 남자친구는 내가 로마에서 근무할 때 직장 동료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한 번 본 사람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지구는 생각보다 정말 좁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어디서 누구를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니 왠만하면 친절하자는 것이다. 짜증이 나더라도 속으로만 짜증내고, 겉으론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두 번째, 내 꿈을 모두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
나는 대학 졸업이 남들보다 조금 늦었다. 재수도 했고, 편입도 했다. 편입 준비 당시 1년간 휴학하고 영어 점수를 만들며 고군분투했다. 전 학교에서 학생회까지 할 정도로 애정을 가졌지만, 휴학을 하고 공부한다고 하니 다들 궁금해했다. 내가 편입을 준비한다고 하자 “편입 어렵다”, “너무 늦은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UN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엔은 아무나 못 들어간다더라.", "아는 사람은 준비하다가 시간만 갔다더라." 석사를 시작할 때도, “국제기구는 봉사하는 곳 아니냐 그런 곳에서 석사가 왜 필요하냐”, "석사로는 아무것도 못한다더라, 박사까지는 해야지." 등의 지나친, 우려가 섞인 말들을 들었다. 물론 그런 말들이 자극이 되어 더 열심히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생기지도 않은 실패를 먼저 걱정하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 외엔 내가 뭘 하겠다고 굳이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믿고 나의 감각을 따르는 법을 더 잘 알게 되었다.
세 번째, 인생은 밸런스 게임이다.
유엔 시스템 안에서 나는 정말 많은 워커홀릭들을 봤다.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그들은 멋졌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커리어 외에도 인생의 다양한 요소들을 균형 있게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에는 작년의 번아웃 경험도 크게 작용했다. 지금도 완벽한 밸런스를 맞추는 건 어렵다. 하지만 요즘은 취미도 찾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인생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고 있다. 연애도, 일 외의 삶도, 다양한 경험에서 오는 감정도 유연하게 바라보려고 한다.
그 외에도 삶을 살며 깨달은 많은 생각이 있었지만, 그날 내가 떠올린 인생의 교훈은 이 세 가지였다. 우리는 팀별로 각자의 교훈을 공유했고, 그중 가장 괜찮은 두 개를 추려 다시 투표를 했다. 나의 교훈은 아쉽게도 뽑히지 않았고, 몇몇 친구들이 가져온 교훈은 서로 겹치기도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선정된 삶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삶에서 힘든 시간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맞서야만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전에도 Conflict(갈등)이라는 주제를 다루며 인생의 역경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인생의 역경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우리의 삶은 결국 그런 순간들을 하나씩 마주하고 헤쳐 나가는 여정이 아닐까. 그렇기에 이 문장은, 인생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깊이 공감될 수 있는 메시지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 문장이 오늘 우리가 만들어야 할 극의 주제가 되었다.
조를 나눠 극을 만들기로 했고, 나는 아야, 로즈와 같은 조가 되었다. 로즈는 아이디어가 많고 발랄한 친구였고, 극의 줄거리에 대해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쳤다. 그녀가 제안한 내용은 이랬다.
나와 로즈는 연인 관계이고, 나는 이 사실을 나의 엄마인 아야에게 고백하려 한다. 로즈는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지만, 막상 엄마에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엄마가 먼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하며 분위기를 바꿔버린다.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로즈는 실망해 나를 떠나려 한다. 이후 나는 다시 엄마에게 찾아가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로즈와의 관계를 털어놓는다. 엄마는 혼란스러워하지만, 결국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준다.
이 씬의 클라이맥스는, 로즈가 나를 떠나며 다투는 장면과, 내가 혼자 고뇌하다 결국 엄마에게 모든 걸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얼떨결에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되어 부담이 컸고, 아야는 아파서 온라인으로 참여했기에, 화면 속 엄마와 연기 호흡을 맞춰야 했던 점도 도전이었다.솔직히 말하면, 이야기 구성이 너무 드라마틱해서 처음엔 내키지 않았다. 막장 드라마 같은 전개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딱히 대안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이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무대에 올라, 감정을 정리한 후 로즈와의 씬부터 시작했고, 혼자의 고독한 시간을 지나 다시 아야와 마주하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그 장면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말했고, 아야는 화면 너머에서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물었다.
“너 정말 행복하니?”
그건 대본 없이 진행된 즉흥연기였지만, 그 질문은 진짜 엄마가 나에게 던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찡했다. 그렇게 우리는 연기를 마쳤고, 로빈은 다음 과제를 내주었다. 오늘의 극을 바탕으로 대본을 쓰고, 다음 수업에서는 그 대본을 외워 연기해보라는 것이었다. 몇 주 뒤면 공연 준비가 시작되기 때문에 이제는 대사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살면서 내가 게이 역할을 연기해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바로 연기의 매력 아닐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인생을 살아볼 수 있다는 것.
나에게 있어 ‘경험’은 언제나 중요한 가치였다. 앞서 말한 두 번째 인생 교훈처럼, 나는 수많은 부정적인 말들과 조언 아닌 조언들 속에서 상처받았고, 그것을 직접 이겨내며 지금까지 걸어왔다. 사람들이 “안 될 거야”라고 말하던 일들을 하나씩 해냈기에, 나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경험해본 것만 믿는다’는 태도는 어느새 내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가기 전 블로그와 후기를 꼼꼼히 읽는 남편과 달리, 나는 리뷰를 잘 믿지 않는다. 내가 직접 가보고, 느끼고, 판단하겠다는 마음이 컸다. ‘내가 다른 사람 말을 듣고 잘된 적이 있었던가’ 이런 생각은 나도 모르게 뿌리내린 일종의 방어기제였고, 새로운 길을 스스로 개척해온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고집스러움이기도 했다. 물론 나는 그런 나를 경계하고, 겸손해지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때때로, 지난날 쌓인 경험이 오히려 나를 더 굳게 만들고, 경험하지 않은 세계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들기도 했다.
나의 연기 여정은 어쩌면 지금 시점에서 나에게 꼭 필요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연기란 결국,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 자신을 던져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인물의 감정, 선택, 말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 때로는 공감할 수 없어도, 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해야만 하는 순간들. 게이 역할을 연기했던 그 순간, 나는 그 캐릭터를 옹호하고, 그 사랑을 감싸안아야 했다. 잠깐이지만,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연기가 세상에 주는 선한 영향력은, 누군가의 인생에서 건져 올린 교훈을 극이나 영화 속에 녹여,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닿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니어도, 우리는 그들의 연기를 통해 우리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모든 것을 경험하기엔 인생이 짧고 세상은 너무 복잡하다. 하지만 책, 영화, 연극과 같은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값진 일인가. 예전엔 연기를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정도로만 여겼다. 하지만 연기를 더 깊이 들여다볼수록, 그것은 단지 표현의 기술이 아니라, 삶을 탐구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아주 섬세한 예술임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 내 상사가 내게 종종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모두는 매번 배우는 과정에 있는 거야.”
과연 언젠가, 인생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내가 죽기 직전에, 갓 태어난 아기에게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잘 사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런 정답은 끝내 존재하지 않을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 모두는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배우고 있다는 것. 실수하고, 고민하고, 때로는 돌아가기도 하면서도, 조금씩 더 행복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다채로운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하루하루가, 조용히 우리의 삶에 교훈 하나씩을 더해준다.
당신은 오늘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그것이 무엇이든, 오늘도 당신은 교훈 하나를 적립했다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