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일들이 있었다. 한국에 잠시 들어가게 되었고, 주말이 끼는 바람에 매주 토요일 열리는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한 주는 수업이 하루 미뤄지면서, 이미 잡혀 있던 출장 일정과 겹쳐 또다시 수업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연이어 두 번이나 수업에 참석하지 못했다.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2주의 공백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그 사이 출장지에서 로빈, 그리고 내 파트너가 된 유리와 영상통화로 보충수업을 하긴 했지만, 화면을 통해 연습을 이어간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는 교류가 필요했지만 그것조차 잘 되지 않았고, 무대 위 동선을 맞춰볼 수도 없었다.
대본은 로빈이 메신저로 보내주었고, 나는 유리와 몇 차례 통화를 하며 대사를 맞춰보았다.
우리가 맡은 작품은 영국의 유명한 연극 Heart of the Crime의 한 장면이었다. 처음 대본을 읽을 때는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맡은 씬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내 여동생이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이고, 나는 그녀가 그 사실을 털어놓길 바라는 장면이다. 여동생은 남편에게 오랫동안 학대를 당해왔다. 처음에는 말 한마디로 시작된 성적인 모욕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폭력은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 그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총을 들었고, 그 순간 쌓여 있던 두려움과 분노, 절망이 한꺼번에 폭발하며 남편을 쏘아 죽이고 만다. 나는 언니로서 그녀가 이 사실을 숨기지 말고, 스스로의 목소리로 털어놓길 바란다. 하지만 여동생은 여전히 입을 열기를 주저한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녀가 이야기를 꺼내도록 이끌고, 변호사에게 이 사실을 알리길 바란다. 결국 그녀를 지켜야 하는 나는, 원치 않더라도 그녀를 설득해야 했다. 처음에는 차분히, 그러나 점점 강하게, 마침내는 폭발하듯이 털어놓으라고 소리쳐야 했다.
장면은 정말 쉽지 않았다. 수많은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로빈은 우리와 함께 대사 한 줄 한 줄을 해석해 나갔다. 왜 주인공이 그 말을 그 시점에서 꺼냈는지, 새로운 시퀀스가 어디서 시작되는지 하나하나 분석하며 짚어 내려갔다. 대본의 단순한 대사 하나, 예를 들어 “Okay”라는 짧은 말에도 담긴 의미와 감정을 찾아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런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그려내 글로 써내려가는 작가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엄청난 상상력과 창의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며 정확한 의미를 이해해 연기로 구현해내는 배우들 역시도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을 걷고 있음을 느꼈다.
솔직히 쉽지 않았다. 나는 어릴 적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책 읽기는 늘 지루했고, 과제에 불과했다. 읽고, 독후감을 쓰고, 검사를 받아야 했다. 부모님과 학교가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면 할수록 책이 더 싫어졌다. 내가 책과 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 올해 들어서다. 커리어만 좇으며 살던 나에게 번아웃이 찾아왔고, 올해는 ‘내면의 힘을 기르자’라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책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철학책 같은 가벼운 책에서 위로를 얻으며 책 읽기의 재미를 조금씩 알게 되었고, 뒤이어 추리소설에서 극강의 재미를 맛봤다. 그러다 보니 점점 책을 찾게 되었고, 이동 중이나 태국에서 흔히 받는 마사지 시간에는 오디오북을 듣기도 했다. 서른이 넘어 처음으로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든 건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그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연극 대본을 분석하면서, 과거의 나날이 조금 아쉽기도 했다. 어릴 때 책을 좀 더 읽어뒀더라면 이런 대본들도 더 빨리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로빈은 연신,
“수리, 왜 그런 말을 했겠니?”
라고 물었지만, 씬 자체가 어렵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 머릿속은 정답을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대본 분석을 마치고, 이제는 암기에 들어가야 했다. 다행히 상대역 배우보다는 대사량이 적었지만, 요즘 계속 이어지는 출장과 업무에 치여 틈틈이 외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보려 했고, 파트너 유리와 줌 미팅을 하며 호흡을 맞춰보기도 했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필 가장 바쁜 시기와 겹쳐 그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그럴수록 내가 연기를 시작한 이유
내 내면의 감정에 귀 기울이고, 일상의 무게를 덜기 위함을 되새기려 했다.
아무튼 연이은 연습에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연극이 주는 해방감과 즐거움은 분명 있었지만, 그 뒤에 따라붙는 피로감과 의문도 커졌다. 나는 지금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을 얻고 있는 걸까. 그리고 무대 뒤편에서 내가 마주한 모습들은 정말 괜찮은 것일까.
아마 다음에는, 내가 느낀 연기와 이 분야의 불편함에 대해서도 조금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