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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마치며

by 수리

마지막 주는 공연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공연은 일요일 저녁이었고, 우리는 주중에도 몇 차례 모여 연습을 이어갔다. 토요일은 아침부터 밤까지, 일요일도 아침부터 계속 리허설이 이어졌다. 이제는 의상도 갖추고 동선도 확실히 맞춰야 했으며, 씬 전환을 위한 무대 교체 연습도 필요했다. 모두가 배우이자 스태프였기 때문에 연기와 무대 정리를 함께 담당해야 했다. 내 씬이 끝나고 조명이 꺼지면 곧바로 어둠 속에서 무대를 바꿔야 했는데, 조명이 다시 켜지기까지 10초 남짓밖에 없으므로 빠르고 정확해야 했다.


씬을 다듬는 작업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으면 더 완성도를 높일 수 있겠다는 아쉬움과, 이제는 빨리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교차했다. 특히 감정 소모가 큰 장면이 많아 한 번 연습만 해도 진이 빠졌고, 연속으로 반복하다 보니 머리가 핑 돌 정도로 힘들기도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유리와 격렬하게 부딪친다.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려는 나와 그것을 막으려는 유리(베이브) 사이에서 몸싸움이 벌어지고, 고함도 터져 나온다. 체력적으로도 매우 고된 장면이었다.


우리는 같은 씬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중간중간 준비해온 점심과 간식을 먹으며 연습을 이어갔고, 매번 로빈의 피드백을 받으며 영상을 찍어 내 연기를 확인했다. 지치기도 했지만 이제 진짜 마지막이기에, 혼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친구들의 씬도 함께 보며 우리는 서서히 공연 준비의 끝을 향해 나아갔다.


공연 한시간 전 우리는 간단히 몸을 풀엇다. 수업시간에 늘햇던, 걷기, 즉흥연기, 소리지르기 등으로 긴장감을 풀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둥글게 모여서서 잘하자고 의지를 다졌다. 로빈은 실수해도 괜찮으니, 무대를 즐기라고 말했다. 어차피 극은 흘러가니 무대 위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쏟아내라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상대와 나의 연결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래, 즐기는 거야.


공연 당일, 나는 남편을 초대했다. 다른 친구들도 부를까 고민했지만, 많은 사람이 오면 오히려 더 긴장할 것 같아 응원만 받기로 했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될 즈음 나는 무대 뒤에서 로빈이 공연 시작을 알리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내 씬은 두 번째였고, 암흑의 무대 뒤에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되었기에 숨소리마저 조심해야 했고, 앞 무대의 흐름에 귀를 곤두세웠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초조함과 긴장, 설렘과 흥분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이런 떨림을 느껴본 게 도대체 얼마만이던가. 늘 연극은 객석에서만 바라보던 나였기에, 무대에 사길 기다리는 이순 간은 참 특별하고 벅찼다. 세 달 동안의 시간이 이 한 장면에 담길 것이고, 나는 그 모든 감정을 다 쏟아내리라 다짐했다. 머릿속으로는 직전까지 로빈이 짚어준 디렉션을 되새겼다. 옆에 선 유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손톱을 물어뜯고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나는 그녀를 다독이며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응원했다. 잠시 뒤, 아야와 엘리나의 씬이 끝나고 드디어 우리의 차례가 되었다.


베이브를 소리치며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씬. 무대 불빛 너머, 객석 맨 앞줄에 앉아 있는 남편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지만, 나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다행히 몰입하기 시작하자 관객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베이브와의 대화, 그녀의 독백 속의 나의 내면 연기, 마지막 격한 싸움 장면까지 약 15분의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조명이 꺼지자 곧바로 어둠 속에서 무대 전환이 이어졌다. 나와 유리는 10초 남짓한 시간 안에 재빨리 무대를 바꾸고 퇴장해야 했다.


무대 밖으로 나오자, 나와 유리는 서로를 얼싸안으며 다독였다. 분명 연습 때보다 훨씬 몰입된 연기를 해냈다. 내게도, 그녀에게도 그것이 전해졌고, 서로의 눈빛 속에서 더 깊이 연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이윽고 모든 친구들의 씬이 끝나고, 마지막 무대인사가 이어졌다. 뮤지컬이나 연극을 볼 때 늘 느끼던 것처럼, 무대인사는 관객을 극에서 현실로 이끌어낸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극 중 인물이 아니라, 배우 그 자체로 관객 앞에 서 있었다. 그 순간이 참 좋았다. 인사가 끝나자 음악이 흐르고, 우리는 무대 위에서 가볍게 춤을 추었다.


그때, 누군가 내 앞에 다가왔다.

오늘, 우리의 첫 결혼기념일.

수많은 관객 속에서 오직 나를 보러 와 준 단 한 사람,

나의 남편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이렇게 문득 아름다운 영화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우리는 저마다의 다양한 영화 속을 살아가고 있다. 그 속에서 사랑과 행복, 고난과 클라이맥스가 교차하며 우리의 삶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든다.


연기를 배우며 나는 처음 바라던 대로 내 감정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했고, 어린 시절부터 자라오며 쌓여온 내 가치관과 마음의 결들을 다시금 마주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연기든 삶이든 결국 우리가 가장 충실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순간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내는 삶의 한순간 한순간이 사실은 모두 의미 있고, 또 아름다운 장면일 수 있다는 것.


행복도, 사랑도, 고난도 결국은 당신이 만들어가는 한 편의 영화의 일부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전하고 싶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오늘도 묵묵히 살아내 주어 고맙다고.


우리 모두 각자의 삶에서 주인공으로 서 있다. 그 여정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함께 최선을 다해 살아내 보자. 결국 인생도 하나의 극처럼, 흘러가고 있으니.



지금까지 저의 취미 연기 기록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기를 배우며 느낀 순간들과 감정들은 이 글에 다 담기엔 부족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문득 떠오를 때마다 브런치에 조용히 남겨두려 합니다. 다시 한 번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따뜻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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