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에 만들어 간 대본을 바탕으로 짧은 씬을 준비해 갔다. 나는 함께 팀이 된 아야와 퇴근 후 영상통화를 하며 대본을 만들었고, 그 대본으로 연기 연습을 했다. 그러고 나서 로빈과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극을 선보였다. 저번에 즉흥으로 상황을 만들었을 때는 아무래도 몰입이 잘 됐는데, 대본이 있으니 무슨 말이 다음에 나올지 짐작이 되고, 나 역시도 좀 더 몰입하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나도 공감이 갔다. 연기를 하면서 떨쳐내려 해도 머릿속에는 다음 대사가 자리 잡았다.
지금부터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오히려 코끼리가 더 생각나는 것처럼, ‘다음 대사는 없는 거야’라고 생각하면 머릿속에는 더더욱 다음 대사가 떠올랐다. 오히려 즉흥 연기 쪽이 더 쉽게 느껴졌다.
로빈도 내가 우려한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생각이 많아 보이고, 다음 대사가 나올 것이 보인다는 것이 그의 피드백이었다. 나 또한 공감했다. 머릿속에 무슨 말을 할지,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할지 알고 있는데, 그것을 전혀 예정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우리는 몇 번 더 씬을 연습하고, 로빈이 요구한 대로 즉흥적인 부분을 조금 더 추가해 연기를 선보였다.
운동이든 일이든 무언가를 할 때 ‘힘을 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힘을 빼는 건 쉽지 않다. 연기도 마찬가지였다. 흐르는 대로 감정과 상황을 따라 움직이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정해진 대사가 있기에, 그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관념이 머릿속에 자리 잡는 순간, 그것을 떨쳐내기는 어려웠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연습만 해왔다. 초등학생 때 방학 숙제로 늘 해오던 것이 동그란 원판 위에 나의 하루 계획을 세워 넣는 것이었고, 학창 시절에는 다이어리를 쓰며 계획에 따라 살아왔다. 몸은 그 계획에 더 익숙해져서, 어느덧 계획이 없으면 불안한 사람이 되곤 했다. 하지만 인생이 내가 원하던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늘 계획을 세운다. 몇 살에는 대학에 가야지, 몇 살에는 취업을 해야지, 몇 살 전에는 결혼을 해야지, 몇 살에는 아이를 낳아야지.
그 계획에서 벗어나는 건 굉장히 힘들었다. 온전히 나만 바라보고 계획을 세우기에는 수많은 기준과 사회적 잣대가 둘러쌌다. 온갖 비교와 ‘지금은 무언가를 이뤄야 마땅한 나이’라는 세상의 시선은 실로 따가웠다. 해외에 나와 나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서야 비로소 조금은 그 따가운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본투비 한국인이라,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외국인을 만나면 ‘쟨 몇 살이더라’가 무의식적으로 궁금해지기도 했다. 모두 각자의 속도가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살아내는 데는 서툰 내 모습이 마치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대사들을 겨우 배열에 맞춰 어색하게 내뱉고 있는 모습 같았다.
나는 극의 흐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대본은 내가 만든 대본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어색한 이유는, 정확한 대사를 내뱉어야 한다는 고정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연기에서는 대사를 틀려도 장면이 무너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틈에서 예상치 못한 반응과 웃음이 생겼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계획에서 벗어난 순간이 어쩌면 가장 살아있는 장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다른 팀들이 준비해 온 씬들도 함께 보았다. 정말 즉흥 연기에 소질이 있던 친구들 중에서 대사가 생기면서 오히려 어색해진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정말 자연스럽게 연기를 이어 나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다음 주부터는 우리가 마지막 회차 때 선보일 극의 대본을 받게 될 것이라고 로빈은 말했다. 어떤 씬을 받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벌써 어느덧 한 달가량 남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연기 수업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인생에 대해 깊이 고찰할 시간이 많아졌다. 살아간다는 것을 온전히 느끼고 인지하는 일. 바쁜 일상 속에서 그 의미를 수도 없이 흘려보냈고, 나의 성장은 늘 커리어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면의 성장에도 마음을 기울이게 되었다. 서른둘이라는 나이가 20대에게는 어른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나는 아직 영글지 않은 어른이기에 여전히 다듬어야 할 내면의 모습들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나를 봐 달라고, 나를 알아 달라고 조용히 외치던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 시간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걸 몰랐다. 멋진 어른, 좋은 어른은 저절로 되어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인생의 다채로움을 경험하는 일은 정말 어렵고도 재미있다. 앞으로 삶의 다양함을 더 찾아보고 탐험하고 싶다. 너무 힘을 주기보다는 조금 내려놓고, 여유롭게 인생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싶다. 자연스러움, 그리고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찾기 위한 여정에 조금씩 가까워져 보자.
그리고 물론, 다음 주의 연기는 오늘보다 한층 더 자연스러워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