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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리 May 05. 2022

열네 권의 일기장

좋아하는 물건, 다이어리와 노트 (1)


일기 쓰기는 문구 수집만큼이나 오래되었고 서랍 속 귀여운 물건들만큼이나 소중한 취미 생활 중 하나이다. 그 시작은 남들과 비슷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매일 일기 쓰기라는 숙제가 생겼고, 매일 쓴 일기는 담임 선생님과 엄마에게 공유되어 일기 아래 두 사람의 코멘트가 사이좋게 달리는 날이 많았다.

그럼 여덟 살 무렵부터 일기 쓰기를 좋아했던 걸까?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은데, 또래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일기 쓰는 걸 힘들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고, 방학 때 며칠을 빼고는 매일 성실하게 쓰는 학생이었다.


숙제 말고 온전히 나의 의사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아마도 중학생이 되고 나서일 텐데, 사실은 일기 쓰기에 대한 순수한 애정 때문은 아니었다. 책가방 크기의 멋없는 공책 말고 ‘다이어리’라는 물건을 알게 됐고, 이미 알록달록하고 충분히 예쁜 그 물건이 취향에 맞춰 속지까지 바꿀 수 있다는 점에 완전히 매료되어 해마다 새 다이어리를 구입했다. 새 다이어리를 구입하고 첫 몇 장을 꾸미는 재미 때문에 새해가 오는 것을 좋아했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기를 쓰기 위해 다이어리를 구입한 것이 아니라 예쁜 다이어리를 샀으니 뭐라도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연초 며칠 동안 열심히 일기를 쓰곤 했다.


진짜 일기,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건 중학교 졸업 무렵 혹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일 거다. 그 무렵 나와 가족의 삶에는 세찬 바람과 물결이 일기 시작했는데 그 풍파 속에서 쓰지 않고는 견디기 어렵다는 사실을 자연히 그리고 일찍이 깨닫게 된 것 같다.

그 시절 10대 여자아이의 취향답게 속지가 귀여웠던 다이어리에는 그런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가 기록됐는데, 아직 10대 청소년답게 어느 날에는 허무맹랑할 정도로 희망에 찬 이야기가 쓰이기도 했다.


2007년부터의 기록
2007년부터 작년까지 쓴 열두 권의 일기장은 이렇게 보관 중이다.
보관 중인 것 중 가장 오래된 두 권의 기록들. 왼쪽의 스티커는 라벨지에 직접 그리고 코팅한 것이다. (공부는 안 하고) 참 부지런했다.


나에게는 아홉 살 차이 동생이 있다. 동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텐데 어린 동생들은 언니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당부한 일을 꼭 하고 마는 존재다. 우리 집에도 그런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동생이 나의 일기장을 몰래 읽는 일이었다. 어려서 그랬는지 동생 손끝이 야무지지는 못해서 동생이 일기장을 읽고 나면 꼭 내가 알아차릴 수 있었고 그러면 동생에게 마구 화를 내곤 했다. (짧게 끝이 나기는 했지만, 동생이 나를 무서워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몇 해 전 동생이 일기 몰래 읽기를 아주 그만두었다고, 그러니 이제 일기장을 감춰두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한 일이 있었다. 그만둔 이유는 내게 혼이 날까 봐 무서워서 그런 것은 아니고 자기 나이가 일기장 속 내 나이를 얼추 따라잡게 되면서 자기와 또래였던 내가 지나온 시간, 그 속의 감정들을 읽고 감당하는 게 어려워졌다고 했다.

동생의 그 고백은 이상하게도 나에게 힘이 됐는데, 누구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마음이지만 그럼에도 누가 알아차려 준다는 것, 내가 지나온 시간을 자신이 지나왔더라면 아마 자신도 그만큼 힘들었을 것이라고 공감해주는 마음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동생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언니의 일기 몰래 읽기-이 동생이 나를 언니를 넘어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난날의 기록들
동생과 첫 여행이 담긴 기록과 간단 그림 일기에 빠졌던 시절의 기록
다이어리마다 영화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저 해에는 극장에서만 41편을 봤다!)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슬픈 날, 어둡고 화가 나는 날에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런 날 썼던 일기를 다시 읽는 게 어렵고, 어린 감정에서 나왔던 문장들을 어른이 되고 읽는 게 어쩐지 부끄럽고 불편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오래 일기를 쓰며 느낀 것이 쓰는 행위에는 자기 치유의 힘이 있다. 설령 종이 위에 뱉어내는 말들이 순 부정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마음 안에만 두고 삭이는 것보다는 또는 어설프게 타인에게 털어놓고 돌아와 후회하느라 잠 못 이루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부분이 있다.

어린 날의 일기를 읽다 보면 사람들 말처럼 때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잠시만 주먹 꼭 쥐고 참으며) 천천히 읽다 보면 ‘내가 이런 시간을 지나왔지. 그래도 지금으로 잘 건너왔네’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곤 한다.

쌓이는 일기장을 언제까지 어떻게 다 보관할지 고민스러운 날도 있지만 계속해서 일기를 쓸 것 같고, 아마도 나중에 일기 쓰는 할머니가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재미있고 행복한 마음이 된다.


지금은 몰스킨을 씁니다.


올해의 일기가 담긴 두 권의 노트. 울퉁불퉁해 쓰는 게 불편했던 동백꽃 노트를 다 쓰고, 인생 첫 몰스킨 제품을 구입해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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