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중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미술씬에서 나를 소개할 때면 어김없이 묻는 몇 가지 질문이 있다. 미술을 공부하는데 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는지 사람들의 물음 속에는 의심과 의아함이 공존한다. 의례 유학파라면 파리나 뉴욕을 떠올리는데 나는 뜬금없는 중국, 그것도 상하이라고 하니 ‘뭐지 이 듣보잡은?’ 같은 류의 반응이 종종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사회에서 중국 유학생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지 않았고, 도피유학 정도로 치부했으니 (실제로 초기 중국유학생들 태도가 부정적 시선을 갖게 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의 물음 속 부정적인 뉘앙스를 느낄 때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내가 중국에 온 이유를 차근히 설명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영화제작 동아리에서 연출과 시나리오를 파트를 맡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처음으로 나간 청소년 영화제에서 최고 득점으로 최우수상을 거머쥐며 교육감 상을 받았다. 영화를 만들기 위한 기획안부터 편집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들이 정말이지 재밌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영화나 광고를 만들고 싶어 했는데, 그런 나를 잘 알던 아빠는 몇 가지 타협안을 제시했다. 여자가 일하기에 영화판은 너무 거칠고, 나중에 아이를 낳고 일을 하기 쉽지 않을 것 같으니 영화가 아닌 미술시장을 공부해 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2006년 즈음 미술전시는 재벌가와 그에 준하는 재력가 등 소수의 그룹이 향유하던 고급 취미생활 또는 사교모임 정도였다. 보통의 사람이 갤러리에 전시를 보러 가는 일이 드물던 시절이다. 나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자랐으니 더더욱 부자들의 문화생활을 알리 없었다. 하지만 아빠가 내게 “미술쇼핑”이라는 책을 선물로 주시면서 내 인생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책 속의 이야기는 미술을 예술적 측면으로 가 아닌 경제재로의 이야기를 했다. 미술이 왜 돈이 되고 경제가 되는지, 유럽이나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술시장의 이야기는 어린 나의 마음에 엄청난 호기심의 불을 지폈다.
우리나라도 곧 소득 3만 불의 시대가 도래할 텐데,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을 영화관 가듯 갈 것이고, 그림을 사서 집에 걸어둘 때가 오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미술사나 전시기획이 아닌 미술시장과 미술산업을 준비하며 시장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당시 한국에는 미술시장, 미술경영과 같은 개념이 없었고 당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전 세계는 중국을 집중하던 때다. 중국시장이 커지면서 덩달아 중국 현대미술이 엄청난 속도로 세계 미술시장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나는 주저 없이 중국을 선택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미국으로 패권이 바뀌었고,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아시아로 힘의 균형이 옮겨가던 때였다. 중국시장의 중요성이 거론되던 때였기에 나는 주저 없이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유학을 결정 이후에도 몇 가지 고민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내게 당연히 베이징으로 가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나는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상하이로 유학지를 결정했다. 애초에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아니고, 미술사나 전시기획이 아닌 ‘미술시장’, ‘미술산업’과 같은 생소한 것들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치색이 강하고 보수적인 베이징 보다는 자본이 풍부하고 무역이 발달하여 개방성이 높은 상하이가 적합하다고 느꼈다. 특히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장강이남(長江以南)의 사람들이 그림을 소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술이 아닌 경제적 관점으로 바라봤을 때 나의 선택은 상하이었기에 나는 신나는 마음으로 중국으로 가고 말았다.
겁도 없이 중국으로 떠났고, 일가친척과 주변 지인 중 미술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미술시장과 미술산업의 새로운 세계로 발을 딛게 되었다.
그렇게 10년을 상하이에서 치열하게 살았고 4년 후 다시 상하이에 돌아왔으니 사랑하던 이를 다시 만난 듯 설레고 들뜨면서도 긴장된 마음으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당시의 치열함은 잠시 접어두고 사랑의 마음만 담아 상하이 미술여행을 시작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