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 산업이 될 날을 기다리며
소름 돋을 만큼 일이 쏟아지는 요즘이다. 내 인생에 바쁘지 않은 적이 없고, 열심히 일 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요즘은 정.말.로 바쁘다.
이직한 지 이제 갓 한 달이 넘었는데 첫 주를 제외하면 매일 야근 중이다. 내 친구는 올해 나를 기어코 결혼시키고 말겠다며 양팔을 걷어붙이고 남자를 소개하고 있지만 매일 야근 중인 나는 소개팅을 결국 취소했다. 귀국한 지인들과의 선생님들의 행사는 당연히 가지 못했고 약속은 계속 미뤄지고 있는 중이다. 상반기에는 회사 적응을 최우선으로 두고 지내려고 했지만 이것은 내 계획보다 훨씬 하드코어 하다… 맙소사.
이것이 지속 가능한가 걱정이지만 우선 닥친 문제를 해결하고 불안정한 팀을 정비하는 게 시급하니 불나방처럼 또 일에 달려들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재밌는 상황들을 마주하고 있다.
대기업 유통사의 아트팀에 있다가, 아트가 주인 대기업 계열사의 문화재단으로 오니 같은 계열사지만 이토록 다른 기업문화를 마주하며 매일 놀라고 있다.
의식주의 거의 모든 부분을 다루는 백화점은 시장경제 흐름에 당연히 민감하다. 매출과 업계의 선두 자리를 지키려고 목숨을 건다. 좋은 브랜드를 섭외해야 하고, 여러 방면으로 고객 서비스 강화를 위해 골몰하고, 어떻게 하면 고객이 더 많이 구매를 할 수 있을지 여러 종류의 디자인도 신경을 쓴다.
이 모든 것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작은 팀들이 표도 안나는 일들을 무한반복하고, 부문 간 협력을 위해서는 끝도 없는 보고장표를 만들어 부문장님 컨펌을 위해 대기해야 했다. 험난한 부문장님 보고가 끝나면 팀장님은 손발 떨리는 대표님 보고까지 가야 하고, 팀원들은 들어가지도 못하는 보고를 위해 팀장님의 손발이 되어 엄청난 자료 만들기 싸움이 시작된다.
큰 조직의 결정 과정이 너무나 험난하고 길어 나는 이 과정들이 소모적이라 생각했다. 왜 본질이 아닌 일에 이토록 에너지를 낭비할까. 그런 생각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돌이켜보니 이것들은 낭비의 시간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지는 과정이었다. 조직을 배우고, 효율적 보고법을 깨닫고, 핵심을 파악하며 상대를 설득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 이를 통해 산업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의식주가 아닌 예술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으로 오니 확연히 분위기가 다르다. 무척 교양 있고 고학력의 해외파가 주를 이루지만 청자보다는 화자 중심이고, 회사의 성장보다는 개인의 만족이 중요하다. 당연히 팀의 협력보다는 개인의 퍼포먼스를 중시하는 조직이 나는 아직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해할 마음이 아닌 변화되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산업의 파이가 다르니 조직의 크기도 생각도 방향도 그에 비례한 성숙도를 가지구나 다시 한번 느낀다. 언젠가는 미술도 산업이 될 텐데 미술계도 큰 조직이 되어 구성원들이 산업의 역꾼으로, 프로 일잘러 많아졌으면 좋겠다.
물론 나부터 프로 일잘러가 되어야겠지만.
휴. 밀린 보고서와 계획안이나 열심히 만들자.
대감집 노비생활을 돌이켜보며 한번 끄적거려 보았다.
이 재밌는 이야기를 나만 알기는 아까우니까.
#이직한달차 #불만이아니라소망 #그래도야근은싫다
#미술이산업이될그날을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