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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슬아 Jul 06. 2023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니었을까

드라마에서만 보던 일이 나에게도 생겼다

2022년 5월 2일

드라마에서만 보던 일이 나에게도 생겼다. 그 일이 있기 불과 몇시간 전까지만해도 내가 한 것이 흠없이 애틋하고 견고한 사랑인 줄 알았다. 적어도 그와 나, 단 둘이서만큼은 모든것을 공유한 무너지지 않는 성을 지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나는 이별 후에도 슬프지 않을 수 있었다. 앞으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겠지만,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서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신적으로는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지금 나의 그에 대한 사랑은 뜨겁지는 않아도 여전히 단단했다.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라 생각했다. 그의 나에 대한 사랑도 나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건 나의 오만이었을까. 그가 나의 집에 남기고간 짐들을 정리하던 중, 꼭꼭 숨어있던 쪽지 한개가 튀어나왔다. 튀어나왔다는 표현이 꼭 알맞을 정도로 나는 원하지 않았고,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쪽지 하나. 꼬깃꼬깃 접힌, 예쁜 종이도 아닌 메모장을 뜯어 쓴 쪽지. 하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건, 러브레터야. “ 믿을 수가 없었다. 열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홀린듯 쪽지를 펴보고 말았다. You’re my sunshine 이라는 꼴사나운 문장이 대문짝 만하게 쓰여있었다. 그리고  그 글은 아마 누군가가 그를 불렀던 애칭으로 시작했다.


 “1호야, 안녕!”


“형님과 봉봉”이 그와 나의 11년 4개월 동안의 애칭이었다면, 그와 그녀의 애칭은 ‘1호와 쏠이’였다. 그녀에겐 그가 1호였다. 그 시간 동안은 나의 형님이 아니었고, 쏠이의 1호였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형님을 생각하던 그 시간, 형님, 아니 1호는 쏠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각자의 인생의 1/3이나 되는 시간 동안 어느 누가 보아도 우리는 단단한 가족 같았고, 누군가가 끼어들 티미한 틈조차 없었던 변함없는 연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껴야했다. 그의 사랑에 대한 나의 자만과 오만, 혹은 겸손을 몰랐던 믿음 때문이었을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만으로 서른 다섯 해나 살아놓고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기분을 그에게 쏟아낼 수도 없었다. 우리는 이미 일곱달 전에 “좋은” 연애를 마치고 “좋은”이별을 했기 때문이다. 감정을 억누르고 카톡을 보냈다.


<사진>

[아직 보내지 못한 짐들이 있어. 버려도 될것들을 빼고도 한 박스가 남았어. 이 분과 아직 만나고 있다면 이것또한 소중한 추억일텐데, 이것도 함께 보내야할까?]


[뭔진 모르겠지만 그냥 다 버려줘.]


이런상황에서도 그는 비겁했다. 피하는 습관은 어쩔 수 없는지, 울화가 치밀었다.


[역겹네]


 이 세글자에 나는 감정을 가득눌러담아 그에게 처음으로 막말이란 것을 했다.

 몇 개월 전, 그의 짐을 정리해서 보낼 때 나는 집을 떠난 아들을 챙기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함께보낸 시간 동안 나는 충분히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도 필요할 것들만 잘 골라, 무려 100키로가 넘어가는 짐들을 국제우편으로 보냈다. 물론 배송료도 내가 부담을 했다. 생각해보면 그는 그 많은 짐을 받고도, 나에게 어떠한 연락도 한번을 안했다. 억울했다. 헤어진 이후에도 애틋함은 남아있었고, 그래서 더욱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짐을 정리하던 내가 너무 바보같게 느껴졌다.


[지난번에 보낸 소포 여섯박스 우편요금 좀 보내줄래?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소중하다고 생각해온 내가 너무 안타까워서 그래. 시간을 돌릴 수는 없지만 너무 다행히도 우리는 헤어졌고, 헤어진 이후에 쓴 돈은 돌려 받아야 하지 않겠나 싶어.]


 그는 읽고 한마디의 답장 없이 나에게 돈을 보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정말 나와의 시간은 거짓이었나? 우리의 사랑에 진실은 없었나? 일말의 변명이나 거짓 사과를 할 마음도 없는 건가? 나를 만나면서 또 다른 연애를 계속 이어갔던 걸까? 그사람과의 연애는 얼마나 했을까? 2년? 3년? 지금도 만나고 있을까? 우리의 관계가 10년이 넘어서야 나를 가족에게 소개했던 것도 그 사이 이미 다른 여자를 소개했기 때문일까? 연락으로 괴롭히려하지 않았던 나의 배려덕분에 다른 연애를 했던 걸까?


 내 머릿속의 상상을 내가 제어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었다. 퍼져나가는 상상의 크기와 범위가 겉 잡을 수 없는 속도로 확장해 갔다. 이러다간 내가 나를 잡아 먹을 것만 같았다. 이미 끝난 관계에 구차해 보일지라도 나는 설명이 필요했다. 내가 완벽했다고 생각했던 지난 시간이 한순간에 엉망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굳게 자리 잡고 있던 큰 돌 탑이, 순식간에 파도를 맞은 바닷가 모래성 마냥 무너져 내렸다. 이별의 순간에는 쿨했지만 나중에 알게된 배신에 대해서는 쿨할 수가 없었다.

두시간 여를 괴로워하다 나는 그에게 다시 글을 썼다.


[있지, 적어도 당신이 기만한 시간에 대해서는 설명과 사과가 있어야할 것 같아. 어떻게 나의 믿음을 이용할 수가 있었을까.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면서 왜 나를 계속 만난거야? 언제든 헤어질 수 있었는데 왜 내 마음을 붙잡아두고 농락을 한거야?

 지난시간이 나에겐 참 의미있고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는데, 그때의 내가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어. 할 수만 있다면 그 때로 돌아가 왜 모르냐고 믿음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그러면 안되는거라고 나를 붙잡고 다그치고 싶어.

 이미 관계는 끝났어도, 이번에는 피하지말고 답장 줘. 적어도 예의는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거짓일지라도 사과는 받고싶어. ]


시간이 한참 흐르고, 처음으로 장문의 답장이 도착했다. 고백은 있었고 변명은 없었다. 몇년 전, 지인과 연락을 주고받다가 급격히  친해졌고, 그것이 연애의 감정까지 갔다는 것과, 하지만 실제로 만난 것은 한번에 불과하며, 바로 정리한 그 이후 그 사건은 피를 내며 끝없이 옥죄는 가시덤불처럼 자신을 죄책감으로 밀어넣었다고 했다. 나에게도 말할 수 없어 용서를 구할 수도 없고, 자신이 저지른 것이 용서를 받을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상기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화가 많이 났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사과를 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나는 이렇게 마지막까지 최악이야. 나는 평생 미안해할게 그러니 너는 그냥 나를 잊어버려]


그를 지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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