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선생님의 '빨리'가 주는 긴장감
"어떻게 오셨..? 아! 오늘 금식하셨어요? 조영 CT 빨리 찍죠."
아 교수님! 교수님이 서두르시면 저는 어떻게 하나요.
생애 처음으로 병원에서 소환하는 전화를 받은 후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이뤄질 수 있다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정말 천운이었다. 당일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것, 아껴뒀던 연차가 많아서 휴가 걱정이 필요 없었다는 것, 건강검진을 받았던 병원과 회사 위치가 정말 가까웠다는 것, 당일에 외래를 볼 수 있는 교수님이 계셨다는 것. 이런 행운과 타이밍들이 모여 나를 살려준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어떤 타인의 작은 관심과 배려로, 하루하루의 생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시, 병원 상황으로 돌아와서.
병원에 도착하니 나보다 먼저 출발했던 남편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 와중에 무슨 일을 정리하고 오냐고 실컷 잔소리를 들으며 접수를 마쳤다. 애매하게 점심시간이 끼어있는 시간이었는데 원래 예약을 잡았던 교수님보다 더 빨리 봐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시는데 먼저 보겠냐고 물어보셨다. 아무렴요! 누구라도 제발 저를 빨리 파헤쳐주실 수 있다면 저는 가리지 않아요 - 그렇게 예약해 뒀던 시간보다 1시간 정도 더 일찍 교수님을 만나 뵐 수 있게 되었다.
"OO님, 어떻게 오셨어요?"
"아 제가 어제 여기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혈액 검사 결과가 안 좋다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
"혈액 검사요? (마우스를 드르륵드르륵 내리시더니) 어 그러네요...
수치가 많이 높은 편인데, 혹시 지금 공복이세요? 췌장이랑 관련된 수치라서 이건 조영제 넣고 CT를 찍어봐야 할 것 같아요. 바로 찍고 오늘 결과까지 다 보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가능하세요?"
교수님까지 오늘 다 확인하자며 서둘러 이야기하시니 이건 정말 큰일이구나 싶었다. 걱정되는 한편 내심 '그냥 잠깐 수치가 튄 거겠지. 뭐 별 일이겠어?' 했던 안일한 마음마저 파사삭 식어버릴 수밖에... 그런데 하필, 오늘따라 평소에 먹지도 않았던 아침을 챙겨 먹은 거다. 오전 9시쯤 간단하게 집에서 닭가슴살과 계란을 먹고 나섰는데 그게 다 소화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2시간 뒤로 CT촬영 예약을 잡아두고 나와 남편은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검색에 검색에 검색만 거듭했다.
"CA19-9"
이름도 생소한 비밀 코드 같은 이 이름... 소화기계 암의 종양 표지자로 이 수치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암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췌장염, 담관염, 간염, 담석증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수치라고 했다. chat GPT도, 네이버도, 구글도 모두 같은 이야기를 했다. 정상 범위는 0~37인데, 내 수치는 200이 넘었다. 정상 범위를 넘어도 한참 넘었으니 모두가 분주해지는 게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극단적인 N성향의 나는 '췌장암'에만 꽂혀서
내가 정말로 죽으면 어떻게 하지?
췌장암은 발견도 어렵고, 발견하더라도 5년 이내 생존율이 낮다는데 나 이제 겨우 30대 중반인데?
아직 하고 싶은 공부도 있고, 가고 싶은 곳도 많은데 나에게 왜?
2시간의 대기 시간 내내 머릿속에는 저 생각과 고민밖에 없었다.
시아버님의 전립선암 극복 과정을 옆에서 보필하며 다 지켜봤던 남편은 자신은 이런 것들을 이미 한번 다 겪어봤으니 괜찮다고, 별일 없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잠시 - 내가 CT를 찍으러 들어간 사이, 남편은 불안감에 못 이겨 대기실에서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조영제가 몸에 들어가는 느낌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불쾌했다.
온몸에 순식간에 열이 돌았고, 진한 알코올향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몸이 뜨거워진 상태로 나를 삼킬 것 같은 CT기계 안에 들어가서 기계음이 지시(?)하는 대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 쉬었다가. 다시 통 밖으로 나왔다가 또 들어갔다가, 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 쉬었다가.. 몇 번 반복하니 촬영이 끝났다.
또다시, 지난한 대기 시간을 거쳐 다시 교수님을 만났다.
한참 CT결과를 정말 정밀하게 꼼꼼하게 살펴보신 후 교수님의 첫마디는 나를 천국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다시 금방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일단, 췌장에는 이상이 없어요."
(소리 없는 안도와 환호)
"그런데, 소견서 써 드릴 테니 대학병원으로 가세요. 수술 받으셔야겠어요."
(네..? 무슨 이런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지금껏 살면서 받아본 수술이라고는
대장 내시경하면서 나온 용종 2개를 절제한 것과 4살 때 넘어져서 찢어진 눈옆을 꼬메본 것,
이거 2개뿐인데... 대학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한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