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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Nov 09. 2022

이름을 다정히 불러보자!

'슬기로운생활'이 쏘아 올린 작은 공

1.

내 이름은 한글이다. 예쁘고 슬기롭게 자라라는 의미가 담겨 '예슬'이 됐다.


하도 들어 나는 평범한 이름과 뜻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윗세대에겐 낯선지 "한자는 어떻게 써요?" 하는 질문을 꽤 받으며 자랐다. 한글이라고 답하면 내기라도 한 듯 "그래 '슬'을 풀어낼 한자가 없다니까?" 하며 옆사람과 설왕설래하거나 맞장구치는 사람도 있었다.


재밌는 질문들 사이에서 이름에 대한 칭찬을 받아본 경험도 있고, 한문 시간을 비롯한 다양한 상황에서 이름이 한글인 덕분에 이득을 보기도 했는데, 새삼 한글 획수는 많으나 몹시 편한 이름이란 생각이 든다.


이름에 대해 써 내려가다 보니 예쁘지는 않아도 슬기롭긴 한 것 같다며 스스로를 후하게 평했던 한 때가 떠오른다. 지금은 두 의미를 모두 잘 담아낸 채 자랐는가, 자라고 있는가, 확신하지 못하겠다. 확신할 수 있는 언젠가가 오길 바랄 뿐.



2.

그런 내게 이름, 하면 강렬하게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두 개 있다.


첫째는 초등학교 6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오빠와 함께 잠깐 동네 보습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그곳은 아주 작아서 원장 선생님도 매시간마다 여러 학년을 돌아가며 수업을 하셨다.


눈이 큰 원장 선생님은 수학을 가르쳤는데 나만 보면 꼭 "예슬아!" 하고 깜짝 놀랄 만큼 크게 이름을 불렀다. 나는 "네?" 하고 반사적으로 움츠리며 대답했는데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항상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하며 노래를 이어 불렀다.(이 노래 아는 사람 있으려나)


노래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복도에서건 입구에서건 만나기만 하면 시작되는 것 이어서 하루에 예상하지 못할 만큼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주목받는 걸 싫어하는 나로서는 그 찰나의 순간이 너무 수치스러웠다. 네? 하고 매번 바보같이 놀라는 나도, 그런 모습을 즐기는 원장 선생님도, 그 상황을 놀림거리로 만들고야 마는 짓궂은 남자 애들도 다 싫었다.


그 노래에서 불리는 이름이 사실은 예슬이가 아니고 '예솔이'이라는 걸 아시는지. 저는 예슬이고요, 그 노래는 예솔이고요! 하며 바로잡고 싶을 정도로 아직도 뭔가 억울하다. 원장님은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한 장난이었겠지만.



3.

두 번째는 이 에피소드 빼곤 모든 게 잘 기억나지 않는 고3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심적인 안정도 중요한 고3이었는데 나는 절친들과 모두 찢어져 다른 반이 된 탓에 학기 초반 몹시 우울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분단 옆에 앉은 L이 프린트물을 전달하는 나에게 넌 이름이 뭐냐고 갑자기 말을 걸었다.(여고였다. 로맨스물 아님)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한지민이라고 좋아하는 배우의 이름을 대신 말했다. 그는 반갑다며 가짜 이름을 불러줬는데 나는 곧바로 농담이고 이름이 예슬이라고 정정했지만, 동공을 세차게 흔들면서도 무슨 속내였는지 친구는 1년 내내 나를 지민이라 불렀다.


그 당시에는 친구들끼리 문자만큼이나 쪽지와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다. L도 가끔 내게 큼지막하고 시원시원한 글씨로 편지를 써서 줬고, 말로도 그랬듯 편지에서도 자주 나를 지민이라 불러주었다. 우리는 우리가 BF라고 공공연히 서로를 칭했는데, 그 BF란 베스트 프렌드가 아니고 '병신 프렌드'였으며 이름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정말 그렇게 불릴 만하게 놀았고 지냈다.


이제는 철들었지, 나의 BF..?



4.

학교를 졸업하고는 내가 이름으로 불릴 일이 거의 없었다. 직급이 있었으니까. 나는 매니저, 사원, 주임, 대리 사이에서 부유했다.


그랬던 내 이름을 회사를 떠나고 슬기로운생활을 오픈하고는 스스로 부르는 경우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매장명에 담긴 의미를 풀어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절차였기 때문이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남편도 덩달아 자신의 이름 일부분을 호명하는 날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제 이름은 김예슬이고요, 남편 이름은 박찬기예요. 각자의 이름 끝자리를 따와 우리 다운 생활을 하고자 만든 오프라인 공간이 바로 이 슬기로운생활이죠." 하면 남편이 "예, 제가 기입니다." 했으니까.



5.

좋은 의미가 담긴 이름은 자꾸 불러줘야 한단다. 그러면 정말 그 사람이 이름의 뜻대로 좋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라고. 갓 어른이 되고 나서는 내 이름이 불리는 날이 적었지만 요즘의 나는 내 이름을 자꾸자꾸 부르고 있으니까 언젠간 바람처럼 예쁘고 슬기로워 질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도울 찬, 갈림길 기 를 쓰는 남편의 이름도 이제는 '기' 말고, '오빠' 말고, '야' 말고, '찬기'로 계속 불러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도 이제부턴 반쪽이 아니라 이름 모두를 말하라고, "예, 제가 기입니다. 찬기요."라고 소개하라고 꼭 전해야겠다. 갈림길만 계속 나오면 갈팡질팡하는 인생이 너무 서글플 테니까.


나이 불문하고 이름을 부르는 게, 그래서 버르장머리 없는 한 편 그 무엇보다 다정한 인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새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요즘인데, 앞으로는 상대방의 이름을 묻고 뜻을 생각하며 계속 불러줘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누군가의 바람이 담겨 지어진 당신의 이름처럼 이번 생을 살아내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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