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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Jul 15. 2020

비누는 ( )가 없다.

4년 차 부부의 제로 웨이스트 이야기 : 비누 편



 제로 웨이스트는 숫자 0(zero)과 쓰레기(waste)의 합성어로 쓰레기 없는 삶을 의미한다. 친환경에서 필(必)환경 시대로 나아가는 요즘 비교적 친숙한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제로 웨이스트 라이프를 꿈꾸며 플라스틱 물건을 하나씩 바꿔갔는데, 거부감 없이 쉽게 바꾸기 시작한 것은 욕실 용품이다. 플라스틱 손잡이의 칫솔은 대나무 소재로 바꾸고 플라스틱 치실 대신 천연 실크 치실을 사용한다. 너무 흔해서 쓰레기라 인식하지 못하는 휴지도 생산부터 분해까지 환경을 덜 파괴하는 대나무 소재의 것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액체 세정제 대신 종이 포장지로 감싼 고체 비누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욕실에만 4개 있다.



아내 "슬"의 이야기


비누에 관한 인상적인 최초의 기억은 마당에서 폐식용유로 세탁비누를 만드는 할머니의 모습이다. 할머니는 여름이면 날을 잡고 하루 종일 나무 막대기로 큰 대야를 저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기름 냄새가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다. 나는 마당을 휩쓸다 못해 집까지 들어오는 그 냄새를 정말 싫어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으면 저을수록 굳어가는 식용유가 신기해 쪼그려 앉아 기름 젓는 할머니를 바라보곤했다.


 누렇고 투박한 네모의 비누는 고체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불호의 냄새를 풍겼다. 빨간 양파망에 들어있기까지 해서 그물에 달라붙은 녹은 비누는 내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없었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니 -의식하셨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의 삶에는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이 녹아있었구나 싶어 감탄이 나온다.


 비누는 우리가 할머니와 다른 집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존재감을 잃었다. 손 닦는 비누 하나를 제외하고 모든 청결 용품은 플라스틱 통으로 바뀌었다. 여행을 가도 묵는 숙소엔 친숙한 펌프형 제품들이 놓여있었고, 더 괜찮은 숙소에 머물게 되면 통일되고 새하얀 색을 가진 용기들을 볼 수 있었다.


 감탄이 나오는 욕실 인테리어 사진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고급진 호텔 감성을 표방하는 디스펜서들을 쉽게 볼 수 있었으므로 더욱 비누가 소외됐다. 그런 사진을 보거나 리빙샵에 전시된 욕실 제품들을 보고 있자면 미래의 내 신혼집 욕실은 꼭 그렇게 생겨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비누가 잊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집엔 비누가 5개 있다. 욕실에 4개, 주방에 1개.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사람 치고 비누가 생각보다 많다. 개수를 셀 수 있는 건 저마다 역할이 있기 때문인데 욕실의 4개는 각자 바디/헤어/손과 발/빨래의 청결을, 주방의 1개는 식기의 세척을 담당한다.


 처음부터 비누가 많았던 것은 아니다. 미니멀 라이프를 시작하고는 올인원 제품을 열심히 찾아 내 몸을 담보로 테스트를 해봤다. 덕분에 비누 하나로 남편과 함께 5박 7일의 파리 여행도 성공적으로 끝냈다. 하지만 조금만 오래 열이 오른다 싶으면 뾰루지가 올라오는 예민한 피부, '파워 지성' 두피를 지닌 내게 올인원 제품은 적합하지 않았다. 너무 헤퍼서 돈이 술술 나가는 것도 문제였다. 물건을 줄인 만큼 고민이 커지는 것 같았다. 결국 각자 맡은 역할이 있는 비누가 하나, 둘 늘어났다.


 제로 웨이스트를 지향하고부터는 개수보다 브랜드의 이념과 배송 포장법, 성분 등을 고려하며 비누를 고른다. 지구에 좋은 게 내 몸에도 좋다는 생각으로. 같은 비누더라도 이왕이면 비건 제품을, 포장재도 생분해되거나 아예 없는 브랜드를 선택한다. 덕분에 쓰는 중에도, 쓰고 나서도 비누를 사용하면 나오는 쓰레기는 '제로'다.


 글을 쓰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많은 개수의 비누는 제로 웨이스트뿐 아니라 미니멀 라이프와도 가까운 것 같다. 이는 비누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느낀 장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비누는 시작과 끝이 명쾌하다. 플라스틱 용기에 든 제품처럼 별도의 펌프질 없이 사용이 가능하고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이니 언제 새 것을 사야 할지 타이밍 잴 필요가 없다. 다 사용했다고 생각하는 샴푸통 혹은 세제통을 다써보겠다며 물을 붓고 흔들어 며칠의 생명을 연장하는, 환경보호와 구질함 사이의 노력도 필요 없다. 에너지의 미니멀이다.


 이렇게 많은 장점이 있는 비누인데, 새삼 폐식용유로 만든 재생 비누에게 미안해진다. 투박한 냄새와 모양으로만 판단하다니. 비누는 죄가 없다, 첫인상으로 판단한 과거의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

 


 남편 "기"의 이야기


 난 비누를 많이 좋아한 적도 있었고, 정말 싫어한 적도 있었다.


 비누에 대한 좋은 기억은 국민학교 시절 (나이가 미니멀하지 않다) 미술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 비누조각이 실습 과제였는데, 준비물이라고는 동네 슈퍼에서 산 하얀색 빨랫비누(자르면 2개의 흉상을 만들 수 있다)와 문방구에서 저렴하게 산 조각도 세트가 전부였다. 소소한 재료인 비누에 짝꿍의 얼굴을 스케치하고 다듬어 완성하는 재미가 있었다. 꽤나 적성에 맞았는지 그 해 어버이날과 가족들의 생일 선물은 조막손으로 조각한, 전혀 닮지 않은 얼굴의 비누조각이 됐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내 노력이 무색하게 어머니는 아들 몰래 빨랫감에 비누 고유의 깨끗함을 헌사하셨지만.


 대한민국 미술 과목 커리큘럼은 비교적 짜임새가 있는지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에서 직접 일관성(?)을 느꼈었다. 몇 해가 지난 중학교 미술시간에도 비누 조각 실습이 데자뷔처럼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그해에도 나는 같은 반 친구 몇몇에게 비누 조각을 선물했었다. 그 섬세한 작업은 우정을 다지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아마도 그 비누는 그들의 어머니에게 전달됐을 것이다.


 제로 웨이스트를 지향하는 지금의 나에게 그때 깎아서 버린 비누 찌꺼기가 가끔씩 아른거린다.


 미끌거리는 손의 느낌과 빨랫비누의 향은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한동안 남았지만, 군에 입대하면서 싫은 기억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최전방 부대의 산속 생활 중 영 적응할 수 없었던 '빨래 비누로 하는 식판 설거지' 때문이다. 그 비누는 파-란색 빨래 비누로 지금 사용하는 설거지용 비누와는 차원이 달랐다. 비위가 약했던 내게 밥 먹은 후의 식판 설거지 시간은 곤욕이었다. 비누 품질이 저급이었는지 잘 안 닦여서 아무리 물로 씻고 헹궈도 다음 식사 시간이면 희끗한 비눗물 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대 이후, 비누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은 내 삶을 자연스럽게 플라스틱 통에 담긴 샴푸와 바디워시로 향하게 해주었다. 업무를 위해 해외출장을 가면 준비된 어메니티를 펑펑 썼고, 남으면 훈장인양 가져와서 자랑하듯이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온갖 화학성분의 용제들은 잠깐의 향기만 남길뿐 몸에 독을 쌓았다. 간지러운 두피와 트러블이 올라온 등 때문에 피부과를 오래 다니게 된 것이다. 제로 웨이스트를 시작하고 많이 가라앉았지만 등에는 여전히 독의 흔적이 남아있다.


 비누를 아예 사용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예쁜 플라스틱 비누받침대를 사는 수고를 더했고, 결과적으로는 고스란히 버려지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만들었다. 아내와 제로 웨이스트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얼마나 많은 샴푸와 바디워시 플라스틱 통, 비누받침대를 버렸을까? 


 작년 초부터는 해외출장을 가도, 여행을 가도 숙소에 있는 어메니티는 사용하지 않는다. 작년 아내와 함께 간 일주일간의 파리 휴가 때에도 집에서 가져간 하나의 비누만 사용하고 돌아왔다. 줄인 만큼 짐이 가벼웠고 색다른 도전으로 한가득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비누, 그 작은 것 하나 덕분에.


 아내의 말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5개의 비누는 적어도 플라스틱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다.

 다시 비누가 좋아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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