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바티스트의 한 마디가 매섭게 날아들었어요. ‘완벽은커녕 중간도 가지 못 하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이에게 완벽을 요구하고 있을까?’ 울지 말고 또박또박 말하라고 설교하면서 화를 내지 않고 부드럽게 타이르지 못하는 나. 징징거리는 소리를 참을 수 없다는 이유로 불편함과 좌절감에 눈물 흘리는 아이를 몰아세우는 나. AS센터에 들어가 수리를 받아야 할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나 자신인데 말이에요.
내가 만들어 놓은 ‘완벽한 아이’의 허상을 마주합니다. 엄마가 골라주는 대로 입고, 먹으라는 대로 먹고, 씻으라고 할 때 씻고, 하지 말라는 지시를 철저하게 따르는 아이. 불편하고 언짢은 일이 있어도 울거나 짜증내지 않고 명확하게 이야기하며 8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어가 조용히 다음날 아침까지 자는 아이. 세상에나. 이게 어디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요? 목줄을 매단 애완동물도 이렇게 하지는 못 할 텐데 말이에요.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보지 못한 채 책과 이론 속의 ‘어린이’에 사로잡힌 나를 발견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는 행동을 했던 때도 있어요. 2개월이 막 지나가던 어느 날, 젖을 먹은 지 1시간밖에 안 된 아이가 계속 울고 보채는 이유를 찾지 못 해 한참을 동동거렸어요. ‘기저귀가 젖은 것도 아니고, 졸린 것도 아니고, 밥을 먹을 때가 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울지?’ 의아해하며 달래고 달래는데, 가슴에 안긴 아기가 얼굴을 마구 비벼대며 젖꼭지를 찾았어요.
‘응? 젖을 찾나? 수유한 지 이제 1시간밖에 안 됐는데?’ 설마 배가 고픈 걸까 반신반의하며 젖을 물렸는데, 젖을 물자마자 어찌나 정신없이 꿀떡꿀떡 먹던지요. 눈 깜짝할 사이에 양쪽 가슴의 모유를 먹어 치우고 배시시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의 마음을 읽는 대신 육아서 속의 ‘생후 2개월 아기’에 맞춰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생후 2개월 아기는 2시간에 한 번 우유를 먹는다니 젖을 먹은 지 한 시간밖에 안 된 우리 아기가 배가 고파서 울 리는 없다는 확신. 참으로 무식해서 용감한 생각이 아닌가요? 아이는 기계가 아닌데, 살아있는 생명인데 말이에요. 어떤 날은 입맛이 없어 덜 먹기도, 어떤 날은 돌아서면 배가 고파 계속 먹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건만! 저는 육아서가 정리해 놓은 표준값과 평균치에 매달려 그게 바로 현실인양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저마다 다른 얼굴과 지문을 갖고 태어난 것처럼 아이들의 발달 속도와 특징은 모두 달라요. 이렇게 하라는 육아 법칙을 완벽하게 따랐다고 해서 모두 같은 결과가 나올 수는 없습니다. 많은 육아서가 아이가 잘 먹지 않는 것, 잘 자지 않는 것이 마치 엄마 탓 인양 ‘올바르게 교육하면 잘 자고 잘 먹는다’ 말하지만 그야말로 웃기는 소리, 콧방귀를 뀌어줘야 마땅한 소리입니다.
아이가 먹는 양과 수면 시간, 아이의 몸무게와 키가 모자라고 뒤쳐지는 것은 엄마의 탓도, 아이의 탓도 아니에요. 해당 개월 수의 발달 정도는 참고해야 할 보조 자료일 뿐! 아이는 아이만의 세상에서 아이만의 시계에 맞춰 자라납니다.
생후 2개월 아기, 3개월 아기, 만 1세, 만 2세라는 딱지 속에 숨겨진 아이의 개별성을 잊지 마세요. 내 아이만의 특별함을 마주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아이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우리 둘만의 일과와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림책 <완벽한 아이 팔아요>의 묘미는 완벽한 아이를 찾는 뒤프레 부부의 허술함 찾기에 있어요. 글로는 알 수 없는 그림 속의 숨은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오늘도 다짐합니다. 아이는 나의 편리와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부속품이 아니라는 것, 아이는 나와 다른 또 하나의 인격이자 독립된 개체라는 것을요.
아이를 위해서라고 포장하지만 실상은 나를 위한 욕심들을 걸러내세요. 그리고 안아주세요. 불완전하고 부족한 내 모습도, 미숙하고 서툰 아이의 모습도. 우리는 지금 모습 그대로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존재,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림책 활용 TIP
발달 과정에 맞는 책을 고르고 읽어줄 필요는 있지만, 연령별 추천도서와 권장도서 목록에 얽매이지는 마세요. 영유아기 그림책은 주로 0~3세, 4~7세로 분류가 되어 큰 제약이 없는 편이지만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는 순간 학년별 필독도서 목록에 갇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아이들을 책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결정적 요소이기도합니다.
“너는 2학년이니까 2학년 필독서 정도는 다 읽어야지!”가 아니라 “너는 자동차를 좋아하니까 자동차에 대한 책을 찾아 읽어볼까?”로 지도해 주세요. 내 아이가 속한 연령과 학년이라는 대푯값보다 내 아이라는 개별성에 집중하기! 아이가 한참 관심을 갖고 있는 물건이나 동물, 사건을 다룬 책을 권해줄 때 책을 읽는 재미와 필요성을 경험할 수 있답니다.
나를 위한 태교의 시간
1. ‘착한 어린이’의 조건들은?
‘엄마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어린이지, 음식은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어야 착한 어린이야, 착한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거예요, 몸에 나쁜 과자는 먹지 않아요~ 그래야 착한 어린이죠?’
착한 어린이, 바른 어린이, 바람직한 어린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행동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린이의 조건, 내가 자라는 내내 들어왔거나 강요당했던 것들을 적어 보세요.
2. 그게 정당한 조건일까? 착하고 바른 어린이가 정말 좋은 걸까?
어린이의 인권을 누군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린이에게 하는 말과 행동을 어른에게 똑같이 행했을 때 무리가 없다면 정당한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말도 안 되는 요구라면 그것은 아이의 인권을 침해하는 부당한 행위이다.”
내가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을 남편이 나에게 요구한다고 바꿔 생각해 보는 거예요. ‘어리다’는 이유를 ‘여자’라는 이유로 바꿔 써 보았을 때, 여전히 정당하고 수용 가능한 조건은 몇 개나 될까요?
‘넌 여자잖아. 여자는 나약하니까 내 말을 들어야 해. 내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아내예요.’ ‘너는 너무 작고 약하니까 네가 먹고 싶은 음식보다 내가 주는 음식을 먹어야 해. 그래야 건강해질 수 있어요.’
물론 아이와 성인의 인권을 똑같은 조건에서 재단할 수는 없어요. 어린이는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미성숙한 상태이기에 특별한 보호와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돌봄’과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폭력과 강요 또한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아동 인권이 또 하나의 인권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까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 (세계인권선언문)
얼핏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당연한 말이 당연하게 지켜지는 사회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불과 70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투표에 참여할 권리조차 없었으니까요.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동이라는 이유로 침해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돌아보세요.
‘착한 여자, 착한 어린이’는 정말 좋은 걸까? 우리는 꼭 ‘좋은 엄마’, ‘바른 어린이’가 되어야 할까요? 세상이 강요하고 요구하는 조건의 정당성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