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릴 시간

시간과 간절함

by 사각

저기요. 어차피 버릴 시간이면 저한테 파세요.


난간에 골반을 걸치고 있다. 일렁이는 강물을 바라보는데, 누군가 옷깃을 당기며 말을 걸었다. 멀끔한 코트를 입은 여자였다. 어딘가 모르게 성급한 모습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삶은 끝까지 혼란스럽다. 어차피, 그래. 어차피 버릴 시간이었다. 시간을 팔면 무엇이든 준다는 그의 제안을, 시간을 강물에 모조리 던져버리기로 결심한 내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제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있는데요? 사기꾼 같은데.

모르죠. 확실한 사실은 총량이 있다는 것뿐이에요.


정해진 값도 없었다. 간절함에 비례해 시간이 거래됐다. 마치 공짜 같았다. 한 번 시간을 팔면, 누군가에게 다시 시간을 살 수도 있댔다. 꿈, 사랑, 추억, 안정. 그는 시간에 대한 대가로 무엇이든 내어주었다. 마법같았다. 하루종일 별을 바라보는 천문학자가 되었다. 살이 아린 바람이 스치는 언덕에서 별을 보고 있노라면 두툼한 담요와 김이 모락모락한 코코아를 챙겨주는 사랑을 받았다. 기억회로의 한구석에는 따듯한 유년 시절 추억이 자리 잡았다. 매달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없는 아늑하고 넉넉한 집에서 가스비 걱정 없이 보일러를 펑펑 틀었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비루한 삶이 싫었던가.


오늘은 목성이 보이려나. 포근한 털을 덧댄 크록스에 발을 구겨 넣고 현관문을 열었다. 말랑한 크록스의 밑창은 오피스텔의 복도가 아닌 일렁이는 다리 위에 내딛였다. 가장 최근에 빈 소원이 뭐였더라. 간헐적으로 빛을 내는 38도쯤의 돌덩이가 위성인지 별인지 직접 우주에서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간절함이 너무 컸을까. 우주만 다녀오면 여한이 없을 텐데.


마지막 소원을 이루려면 적어도 1년은 더 필요하다. 다리 중간쯤, 과거의 내가 매달려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춘추복을 느슨히 입은 학생이 서 있다. 한 손에는 구겨진 종이를 들고 있다. 핸드폰을 강물에 던진다. 그는 일렁이는 강물에 한 번, 반짝이는 도로에 한 번 시선을 옮겼다. 떨리지만 굳건한 손으로 난간을 붙잡았다. 허리춤에 빠져나온 셔츠의 끝자락을 낚아챘다.


잠시만요, 어차피 버릴 시간이면 저한테 파세요. 이렇게 부탁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