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과 사랑
*
율은 지원가였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들에게 셰르파가 있다면, 극지방과 오지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지원가가 있다. 연구자들은 율에게 연구를 제외한 모든 일을 맡겼다. 설거지나 청소 같은 허드렛일부터, 생존키트 제작, 유사시 연구자들을 구조하는 역할을 위탁했다. 율은 매일 아침 기온에 맞춰 적절한 보온재를 배합해 겉옷을 제작했다. 여느 날처럼 연구자들의 생존키트를 제작하던 새벽이었다. 지구의 기온이 급격히 하강하면서 눈보라가 하늘을 빽빽이 채우기 시작했다. 잠시 눈이 걷힐 때였던가, 각국은 연구자들을 회수하기 위한 캡슐선을 보내왔다. 마지막 남은 연구자 담까지 비행길에 올랐다. 율은 회수 인재 명단에 없었다.
어쩌면 행운이었다. 회수 인재를 태운 비행선은 모두 출발 지점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바다까지 얼린 추위에 끝없이 가라앉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율은 이름조차 명명되지 않은 오지의 섬에서 생존을 시작했다. 자신을 스스로 지원하는 일상이 낯설었다. 혼자 남겨두어 미안하다면서도 캡슐선에 급히 오르는 담의 모순 어린 표정이 종종 떠올랐지만, 감상은 재난 앞에 사치였다. 비축해 둔 식량이 동나고, 보온재까지 바닥을 보일 즈음, 촘촘히 쌓여 단단해진 눈바닥 위로 구조선이 착륙했다.
장율 님의 비행을 책임질 AI 다윤입니다. 탑승 조건은 ‘보온위성 연료 수집 활동’ 참여입니다. 탑승하시겠습니까?
*
연료 전환기 주변을 서성인다. 지구에 남은 유일한 온기를 느낀다. 오늘도 간신히 할당량을 채운 장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율, 다음 주부터는 10구를 채워야 한대.” 갈수록 얼어붙어 가는 지구를 녹이기 위해 보온위성의 온도를 조정했다고 한다. 연료 운반선이 밤낮으로 위성과 지구를 오간다. 초기에는 동물의 사체를 썼다. 화석연료는 삼계절이 존재할 적에 진작에 바닥났다. 태양의 빛조차 닿지 않는 차가운 지구에서 생산할 수 있는 연료는 인공적 화학연료뿐이었다. 이조차 바닥났을 때, 선택지는 하나였다. 만년설 아래 파묻힌 사람들을 자원으로 써야 했다.
탐색 지역을 넓혔다. 늘어난 할당량을 채우려면 지면이 아닌 수면까지 나가야 했다. 얼어붙은 바다 위로 빽빽하게 쌓인 눈이 지면과 수면의 경계를 흐렸다. 첫 탐색이라 그런지 광맥이 따로 없었다. 오늘은 금방 채우겠네. 한 구, 두 구, 세 구. 율은 걸음을 보채며 연료수집함을 채웠다. 열 구째, 울퉁불퉁하게 쌓인 눈을 조심스럽게 걷어내자 익숙한 캡슐선이 드러났다. 그렇게 율은 담을 다시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