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작, 좋아.

꾸준히 생각하고 쓰는 글쓰기

by 슬슬

출근과 등원 준비로 분주한 아침이었다. 아이에게 입을 옷을 골라 꺼내주고 화장대 앞에 앉아 선크림을 바르고 있는 그 순간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얌전히 앉아 나와 아이의 아침 준비를 구경하던 강아지가 짖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옆에 붙어 있던 아파트 방역 일정이 떠올랐다. 놓치면 안 돼! 강아지를 방에 들여보낸 후 서둘러 현관문을 열었다. 다행이다. 소독액이 든 통을 어깨통에 맨 채 막 계단참을 향하던 아주머니가 나를 발견하고 우리 집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오늘로 진짜 다섯 살 형님반에 가는 아이는 평소라면 보였을 보통 이상의 낯가림을 이겨내고 제법 씩씩한 목소리로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래도 오늘 시작이 좋다.


누구 맘대로 봄이 되었다며 얇은 신발을 신겠다는 아이와 오늘은 다시 추워졌으니 뽀글이신발을 신으라는 나, 현관에서 우리 둘의 짧은 실랑이가 아이의 포기로 평화롭게 끝났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짧은 잔소리를 했다. "엄마는 아침에 너무 바빠서 다른 때보다 쉽게 화가 나. 웬만하면 아침엔 엄마 말을 잘 듣는 게 좋을걸?"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는 열린 문으로 들어서며 한 마디를 던졌다. "엄마 하고 싶은 말 다 해. 알겠지?" 참나, 잔소리 그만하라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하다니. 괜히 머쓱해져서 아이 손을 꽉 잡았다. "너 오늘부터 진짜 꽃잎반이다. 알지?"


아이는 늘 어린이집 문 앞에서 헤어지는 순간을 어려워했다. 이제 울지는 않지만 다른 아이들보다는 확실히 길고 진한 등원 세리머니가 필요했다. "엄마, 오늘은 십 여덟 번 안아주고 뽀뽀 다섯 번 해줘. 엄마 머리카락 한 번 더 만질래. 잎새반 선생님 나와야 들어갈래." 등원 후에는 출근길에 나서야 하기 때문에 거의 랩을 하듯 숫자를 세며 세리모니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는 숫자의 크기가 커질수록 세리모니가 길어지기 때문에 어느 날 '십백'은 얼마만큼이냐고 물었을 때 살짝 두렵기까지 했다.


좋은 시작 덕인지, 진정한 다섯 살이 무엇인지 아이의 깊은 깨달음이 있었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섯 살의 허세인지. 마침맞게 잎새반 선생님이 나와 계셔서 일단 아이의 마음이 편안했던 데다가, 신발장에서 "꽃잎반 가니까 진짜 멋지다!"라는 칭찬을 퍼부었더니 단 하나의 세리모니도 없이 교실로 들어갔다. 황송하게도 배꼽인사까지 받았다! 지난 일 년동안 아이를 봐주셨던 잎새반 선생님도 놀라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다, 컸다!"라고 외치며 꽃잎반으로 함께 들어가셨다.


한참 대학원 수업을 듣는 중에 새 담임이신 꽃잎반 선생님에게서 사진과 함께 연락이 왔다. 교실에 들어와서도 스스로 가방에서 물통과 수저통을 꺼내 정리하고 놀이를 시작했다며 집에서도 칭찬을 많이 해달라고 하셨다. 이렇게 기특할 수가. 바로 남편에게 사진과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아이는 아빠의 칭찬(=킨더 초콜릿)으로 또 행복한 저녁을 보낸 것 같다. 수업이 끝나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아이와 남편 둘 다 잠든 모습은 이렇게나 아름답다. 오늘 아이는 진정한 다섯 살이 되었다. 첫 단추를 잘 꿴 것 같다. 나도 새 학기를 무사히 시작했다. 시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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