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하는 마음일까 후련해지기 위한 마음일까
그만큼 긴 휴식을 취해본 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내게 유일한 휴식기는 전지훈련 직전뿐이었다.
당시엔 지금처럼 스크린 골프가 만연하지 않았고 필드에서 바람을 읽으며 공을 쳐야 하는 프로선수가 스크린 시합을 하는 것에도 아직 색안경이 있던 때였다. 지금은 무색하게 자리를 잡았지만.
(스크린 골프가 이렇게 대중화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한국의 겨울은 너무 추워서 정상적인 훈련을 소화하기엔 여러 문제가 있기에
그래서 골프선수들은 일반적으론 빠르면 12월 중순, 혹은 말정도 정도까지 국내에서 훈련을 강행하고 12월 말에서 1월 사이에 전지훈련을 떠난다.
그래서 국내에서 하는 아카데미 훈련이 끝나고 나면 전지훈련을 위해 짐도 꾸릴 겸 짧은 준비기간 겸 휴식기간이 주어진다. 그래봐야 한 일, 이주 정도긴 하지만 그 마저도 완전히 휴식을 취하진 않는다. 감을 잃지 않기 위해 꾸준히 집 근처 연습장에 나가는 선수들도 있고, 이 기간에 스키장에 갔다가 손가락이 부러져 전지훈련을 불참하게 되는 선수도 있다.
처음엔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그저 우선 그 합숙소 원룸 안에서, 연습장에서 도망 나오고 싶었다.
pga테스트(나는 결국 나가지 않은)를 마지막으로 그 해 시즌이 마무리 됐으니 우선 다음 시즌이 시작되기까지 몇 개월의 시간이 있었다.
골프를 치면서 전지훈련을 가지 않은 것도 처음이었다.
몇 주는 골프채도 잡지 않았다. 그대로 방구석에 세워둔 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빠도 그 대화를 나눈 이후로 골프에 대해, 앞으로 계획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으셨다.
엄마도 아빠도 내가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여느 일상과 같이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같이 시장에 가서 장도 보고, 밥도 같이 하고, 주말엔 놀러도 가고, 처음으로 설 명절도 같이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이 지났을 때쯤
슬금슬금 내 안에 불안이를 무시하기 힘들어질 때쯤
친한 동생이 본인이 지금 배우고 있는 프로님께 배워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다니던 직전 아카데미에서 근무하시다가 나가 개인적으로 아카데미를 작게 운영하고 계신 분이었다.
나는 아카데미에 있을 때에도 그 프로님 팀에 속해있진 않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함께 해보진 못했지만
그전부터 레슨에 대해선 명성이 있었기에 그 이야기에 솔깃했다.
'골프를 그만둘 것도 아니잖아. 다들 레슨도 잘한다고 했던 분이니까..'
고민을 시작하기까진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갈 곳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엔 새로운 연습장에서 거리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이모네 집 방 한 칸에서 지냈다.
사촌이 군대를 가면서 비어있던 정말 작은 방 한 칸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잠만 자는 공간이었으니까.
부모님도 걱정스러운 맘이셨겠지만 나 또한 혼자 산다는 건 두려웠다. 그렇게 몇 개월을 지냈다.
곧 사촌의 전역을 앞둔 시기가 됐을 때 이젠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렇게 나는 인생 첫 자취를 시작했다.
관리자가 없는 진짜 홀로서기였다.
살 집을 구하고 살림살이를 사러 돌아다니면서 첫 경험들도 참 많이 했다.
화장실 슬리퍼, 쓰레기통, 발매트.. 원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식사시간엔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먹을지, 언제 먹을지 결정해야 했다.
원해서 시작한 자취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게 참 수고스러웠다. 무서움도 있었다.
학창 시절을 시작하면서부터 십수 년이 넘게 관리자 아래 통제에 따르던 삶에서 나온다는 건 해방이라는 느낌보다 내겐 무거운 책임이며 스스로에 대한 엄격한 잣대가 되었다.
새로운 프로님께 배우면서 매일 출퇴근을 시작했다.
매우 이른 시간에 나갔다 늦은 저녁에 들어오니 자취를 한다고 느낄만한 정신도 없었다. 달라진 건 없으니 어차피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도 않았다.
프로님과 맞춰가며 정신없이 연습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그 겨울을 보내고 새로운 시즌이 되었다.
골프는 참 알다가도 모를 운동이다.
드디어 '이거구나!' 했다가도
'에라이 그럼 그렇지...' 하게 하고 그런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다 보면 나중엔 해탈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 같다. 나쁜 쪽인지 좋은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변화가 시작될 때, 두려움과 걱정이 엄습하지만
기대 또한 따른다.
새로운 곳에서 훈련을 시작한 뒤 새 시즌을 임할 때에도 그렇다.
마치 뭐라도 있을 것 같은,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하지만 난 분명히 달라져있었다. 이제 내 내면 깊은 곳엔 지금껏 없었던 생각이 피어나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무엇을 구체적으로 생각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어느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이전과 달리 그런 생각을 같게 된 건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기대가 모두 사라진 상태였거나 아니면 정말로 이제 다 그만두고 싶은 마지막이길 바랐던 마음일지도.
새로운 곳에서 처음처럼 임한다고 해도 난 이제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시도라고 가졌던 기대가 이미 몇 번째였는지 셀 수도 없다.
이미 수백 번의 배신과 아물 시간도 없이 생긴 상처들로 조그마한 실패에도 더 쉽게 상처받았다.
어쩌면 이미 깨진 유리구슬이었다. 그럼에도 버릴 수 없어서 꾸역꾸역 붙여서 틈이 있는 부분은 모른척했다.
'성적이 잘 나오면 다 괜찮아질 거야.'
사실 난 아무것도 변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런 삶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이거 말고 다른 삶도 떠올릴 수 없었다. 두렵고 무서웠다.
낙오자, 실패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포기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지금 이런 삶이 아무리 싫어도 골프 없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없었다. 지금껏 생각해 본 적도, 경험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간절히 바랐다.
내가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는 희망의 끈이라도 쥘 수 있기를.
그래서 새로운 삶을 고민할 필요가 없기를. 그때의 어리고 겁이 많았던 나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