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내가 살아왔던 프로골퍼의 삶

by 김슬기







언제부턴가 성적과는 무관했다.

난 더 이상 골프를 통해 어떤 이로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선수생활의 전부를 글에 풀어낼 수는 없지만 난 늘 같은 마음으로 노력해 왔고 그래도 내 수준에 꽤 괜찮은 성적들을, 희망을 품어볼 여지는 있는 성적들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좋은 성적을 냈을 땐 '다행이다. 엄마 아빠가 좋아하시겠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부모님께 죄송해하지 않아도 돼서, 밝은 목소리로 당당하게 전화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다 좋지 못한 성적을 냈을 땐 매번 가장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 같았다.


꽤 괜찮은 성적으로 시합이 끝난 어느 날. 부모님께 전화를 하려고 하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재미를 아니, 하다못해 성취감을 느낀 것이 언제였는지 떠올려보았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프로가 되었던 그날도 그런 마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당연히 해야 되는 걸 해냈다는 안도의 한숨이었던 것 같다.


매번 좋은 성적을 낼 수는 없을지라도 가뭄 속 단비처럼 오는 노력의 결과를 조금이라도 향유할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희망을 가지고, 다시 힘을 내 일어날 수 있었다면..



생각을 곱씹을수록 명확해졌고, 내 판단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확신이 없었다면 절대로 그런 큰 결정을 단 한순간에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새 나는 골프를 통해 성취를 느낄 수 없다.

성장하는 재미도

기쁨도

뿌듯함도

기대도 없었다.



그저 바로 나쁜 결과가 또 나오진 않을지. 내일 갑자기 확 무너지진 않을지


조바심이 났고, 두려웠고, 피하고 싶었다.





시합날 새벽 4시, 모텔특유의 냄새와 온기라곤 느낄 수 없는 방.

락스냄새로 절여진 차갑고 흰 이불에서 바스락 소리가 크게도 난다.

무거운 이불을 걷고 일어나 고요한 긴장에 사로잡힌 채 채비를 한다.

짐을 다 싸고 모텔 밖을 나오면 지나다니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여전히 깜깜하다.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난다.


그날의 긴장감이 떠오르기 때문일까? 여전히 새벽공기와 모텔은 불편하고 기분이 나쁘다. 그때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합 전 미리 문을 여는지, 연습장과 가까운 곳으로 찾아봐 둔 근처 국밥집에 간다.

가장 많이 먹는 아침은 콩나물국밥과 김밥. 주문하면 빨리 나오는 메뉴라 짜둔 타임테이블을 망가트리지 않는 안전한 메뉴이기 때문이다.


"콩나물 국밥 하나 주세요."라고 오늘 처음 입을 뗀다.

시합장에 도착한 전날부터 입을 여는 일이 거의 없다. 모텔비를 계산할 때, 식사를 주문할 때 말고는..


밥을 기다리면서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이 있는지 둘러본다.

시합장 근처는 선수들이 묵는 곳이 비슷해서 식당엔 나와 같은 사람들을 꽤 흔하게 볼 수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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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PGA프로 15년차. 타고나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 치열한 스포츠 세계 속에서 버티고, 부서지고, 다시 회복해온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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