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새로운 시작

화장품 알바가 된 前 프로골퍼

by 김슬기





운동을 그만둔 뒤의 삶을 오래전부터 계획해 둔 것이 아니라 막상 공을 안치려고 하니 무엇부터 해야 되는지 막연하기도 했다.


일단 대학교 입학 원서를 넣기로 했다.

당시 23살. 일반적인 대학교 입학시기로는 꽤 많이 늦은 때였지만

우리 바닥에선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골프선수들의 19살은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전향한 뒤 본격적으로 투어를 뛰기 시작할 시기라 그 외에 다른 것에는 신경을 쓸 겨를이 많지 않다. 학생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선수들의 경우 유명한 대학교에서 스카우트제의를 해온다고는 하지만 대학을 들어가고 나면 비록 매번은 아닐지라도 최소한의 강의 수강과 시험 응시를 해야 되기 때문에 전국에서 열리는 시합을 참가하러 다니면서 스케줄 맞추기도 까다롭고 훈련시간도 방해를 받지 않을 수는 없으니 19살에 프로턴을 한 사람들 중에 대학교 입학을 미루는 경우는 꽤나 흔했다.


나 또한 같은 시기에 같은 문제로 고민했었지만 당시 프로님의 반대로 인해 마음을 굳히고 대학교에 대한 마음을 접어두었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비슷한 또래들과 어울려 보고 싶기도 하고 대학교 생활에 대한 로망도 있었지만 사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접어둘 수 있었다.



그만두기로 결정을 내렸으니 더 이상 연습장으로 출퇴근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마침 수시 원서 접수 기간이어서 바로 원서를 냈다.

오래전부터 계속 고민해 오던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어떤 대학교를 어떤 이유로 가고 싶은지 그런 건 없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냥 골프전공으로 유명한 몇 개의 학교에 지원을 했다.

마음 같아선 골프와 완전히 관련 없는 전공으로 지원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대학교 근처에도 못 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새로운 것,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들을 배우는 경험을 해보기 위해서라도 대학교에 가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학교에 들어간 이후에 어떤 결정이 들면 편입을 하든 재수를 하든 하자라는 생각을 하며 타협했다.

그리고 솔직히 해온 게 억울해서라도 이렇게라도 덕은 봐야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생전 써본 적도 없던 자기소개서 쓰겠다고 pc방에도 갔다.

보통 컴퓨터 작업을 개인이 할 일도 없어서 노트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주변에 거의 없었다. 그래봐야 전지훈련 가서 영화시청용으로 들고 오는 경우 외에는.

원서접수 사이트에 가입을 하고 뭐가 뭔지도 모르는 것들을 주변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어찌 몇 곳에 접수를 했다.


프로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실기테스트는 면제를 받을 수 있었고, 면접 기간엔 몇 군데 면접을 본 뒤 다행히 가고 싶던 학교에 합격했다.




대학교 문제를 처리하면서 동시에 계획한 것은 아르바이트였다.


내 또래 친구들이 하는 것처럼 나도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보고 싶었다.

물론 상금으로 돈을 벌 수는 있었지만 그건 내가 그 시합에 참가하기 위해 들이는 것에 비하면 정말 새발의 피였고 그래서 돈을 벌고 있다고 느낄 수조차 없었다.


얼마나 벌 수 있을지, 벌 수는 있을지, 언제 탈 수 있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그런 돈이 아니라

남들이 하는 것처럼 정해진 날만큼 일하고, 정해진 날만큼 쉬고, 정해진 월급날을 기다려보고, 기다린 날짜에, 예측할 수 있는 돈을 받아보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없어서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감도 안 잡혔다.

그래서 경험이 있는 친구에게 물어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사이트에 가입을 했고 내가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을 찾아봤다.

하지만 기본적인 엑셀, 파워포인트 같은 컴퓨터 작업도 다룰 줄 모르고, 사람을 응대해 본 경험도 없었다.

골프 말곤 해본 것도, 아는 것도 없는데 뭘 할 수 있을지 막상 이력서를 넣으려고 하니 내가 자신이 너무 별 볼 일 없는 것 같아 까마득했다.


내가 살던 세계에서는 나를 소개하기 위해 많은 설명들이 필요하지 않았다. 성적만으로. 프로냐, 아니냐 그것만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소소한 성적이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이 바닥에 있으면서 그동안에 내가 쌓아온 것들이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기록들이 있었고, 그것들이 나를 모두 설명할 순 없지만 공감과 이해를 바랄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그들 속에 속해있을 땐 말이다.


그러나 일반인의 사회로 나오고 나니 나는 그들이 알 수 있는 무엇 하나 갖춘 것이 없었다.



KLPGA? 그게 뭔데?



그걸로 나를 설명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사는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울고 불고 노력해 온 과정이 얼마나 있었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증명할 수 있을 거리가 내겐 없었다.

난 벌써 나와 같은 나이의 대학생이 졸업을 준비하고 있을 나이에 학교도 가지 못했고, 골프와 관련된 것 외에는 사소한 경험조차 없었다.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컴퓨터 앞에서 인적사항 외에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 빈 공간을 보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국가자격증도 아니고, 업무와 관련도 없는 자격을 기입해 봐야 오히려 더 구차하게 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골프를 그만두고도 사회에 나오는 것이 겁나 곧장 관련된 일을 찾고 싶진 않았다.

하다못해 골프용품매장에만 들어가도 조금은 수월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세계가 지긋지긋해서 나온 마당에 도전해보지도 않은 채 쪽팔리게 당장 겁먹고 편한 길을 찾고 싶진 않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앞으로 내가 만날 사람들은 나를 24살이 되도록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인간으로 보겠구나'라는 생각에 슬픔과 우울감이 덮쳤다.


알지도 모를지도 모르는 이력을 가지고 내가 하던 일을 뭔지, 얼마나 최선을 다해 노력했었는지 주절주절 히스토리를 늘어놓으면서 나를 이해시킬 수도 없다. 그저 보이는 그대로 나를 보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 나 스스로가 지금까지 뭘 해온 건지, 뭘 위해 그렇게 울고 불고 해온 건지 허무하고 비참했다.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뭐 계속 그러고 있다고 슬퍼지는 것 말곤 상황이 달라질 건 없으니까.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언젠가 겪을 일이었다면, 겪어야 하는 일이라면 힘낼 수밖에.

부딪혀 볼 수밖에.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모르겠다면 내가 좋아하는 걸 해보기로 했다.

당시 메이크업 하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화장품 매장에 이력서를 넣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바로 연락을 받았다. 당장 면접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매니저님은 다음 날부터 바로 출근할 수 있냐고 물었다.



"네!"



기세 좋게 대답을 하고 유니폼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해낼 수 있을까, 실수하지는 않을까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골프와 상관없는 일을 내 힘으로 시작해 본다는 것만으로도 벅참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할 때 느껴지는 두근거림과 불안감 그리고 기대감과 걱정.


시합 직전에 느끼는 느낌과는 비슷한 듯 다른 이 느낌.

마냥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고 굳이 얘기하자면 불편한 느낌에 더 가깝지만 지금은 이전과는 다르게 전혀 예측할 수 없기에 드는 기대감이 있었다.



'뭐가 됐든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삶을 경험하게 될 거야. 내게는 우선 크던 작던 경험이 필요해.'



생각해 보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주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



'뭘 하든 내가 가진 태도를 잃지 않으면 살아 나갈 수 있을 거야. 난 골프를 잘 못 치긴 했지만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니까.'



언젠가 같이 훈련하던 오빠와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빠, 난요. 진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는 건 정말 자신 있거든요. 밤새서 연습하라면 할 수 있고, 몸이 부서지도록 열심히 하는 건 자신 있어요. 그렇게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거라면 좋겠어요. 차라리 그랬으면 쉬울 것 같아요.

근데 골프는 타고난 재능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나는 타고난 재능이 없고요. 재능은커녕 운동신경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슬프지만 내가 얼마나 노력하던지 그건 소용이 없어요. 이 바닥에선 결과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근데 노력, 그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데.."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야. 넌 최선을 다하는 게 가장 쉬운 일이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그게 제일 어렵다고 생각해. 넌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 거야.






골프를 그만둔 건 나에게 호재였다. 흘릴 눈물은 없었다. 운동하면서 다 흘려서 그런 것 같다.

부지런히 운동하면서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해볼 생각이다. 새로운 시작을 써 내려가며 잃어버린 나를 되찾아갈 것이다.


운동할 땐 몸 만드느라 엄두도 못 냈던 다이어트도 해보고,

골프백 없이 트렁크 하나만 달랑 끌고 놀러 가는 해외여행도,

부모님과 보내는 명절도 이젠 가능하다.


대학교에 가면 내일 걱정 없이 친구들하고 술 마시고 밤새 놀아보고도 싶고,

좋은 남자친구도 만나고 싶고,

가족여행에도 이젠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쇼핑 가면 스윙할 때 편한 골프웨어가 아니라 팔이 안 올라가고 불편해도 예쁜 옷을 고르고,

정해진 휴일엔 쉬면서 외국어 학원도 다니고, 이젠 다른 운동도 배울 수 있다.



내일 난생처음 유니폼을 입을 생각에 정성껏 다림질을 해두었다.

유니폼을 보고 있자니 해보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 가슴이 벅찼다.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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